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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전반에는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이 커지고 있습니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6.07.27 / 조회수 : 964

제목 / 영의 세계의 문을 열라
본문 / 사도행전 2장 37~42절 

37.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지금 우리 사회 전반에는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서부터 무너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국가적인 어려움을 맞으면서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우리 신앙도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신약의 교회가 출발하는 장면으로, 우리 신앙의 기본을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2장 14~36절까지는 소심했고 겁 많던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설교의 결론이 36절에 나오는데 구약의 성경을 인용하면서 유대인들에게 날카로운 인상을 남깁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가 놀라운 열매를 맺습니다. 이날 예수를 믿기로 한 사람의 수가 3천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외적인 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떤 경험과 과정을 통해서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37절은 설교의 첫 반응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이들은 이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이 있었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어찌하냐고 물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그들에게 각성이 일어났다는 것은 굉장히 건강한 반응입니다. 사실 사람은 죄를 짓고도 죄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습니다. 중한 죄를 짓고도 태연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죄인이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자각을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영성이 깊었던 다윗마저도 밧세바 사건 이후를 보면 영적으로 무디어져서 굉장히 뻔뻔합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인식을 전혀 못합니다. 다윗만큼 어떤 영적인 수준이 있던 사람이 없었는데 그도 어느 순간 영적 어두움이 오니까 자기 죄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죄를 인식하도록 예화를 들었을 때에도 그 죄인이 누구냐며 오히려 화를 내고 그를 죽여야 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죄에 대해서 아주 둔합니다. 우리가 계속 죄를 짓는 것은 죄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고 죄에 대한 부담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으며 그 일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 나쁜 인간이고 감옥에 넣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 안에도 동일한 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복음이 전해지면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이유가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가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내가 도덕적이고 양심적이고 고상한 지성인인 것 같고 나만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교회에 와서 복음을 접하면 나를 죄인으로 모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 앞에 선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때 불쾌하고 더 강팍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로 하루에 3천 명이 예수를 믿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지만,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보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는 명설교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듣고 난 후 사람들은 돌을 던져 스데반 집사를 죽게 합니다. 같은 설교지만 설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전혀 다릅니다. 어두운 곳에서 죄를 짓고 있는데 누가 갑자기 불을 켜면 화가 납니다. 컴컴한 곳에서 밀거래를 하는데 갑자기 조명을 밝히면 죽이고 싶어지는 마음입니다. 설교를 들으면 자신들의 죄와 부끄러움이 드러나니까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는 찔림과 탄식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이 바뀝니다. 진리를 듣고 전혀 다른 반응이 일어나면서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진리를 듣고 말씀을 읽을 때 우리 내면에는 치열한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입니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어찌할꼬 하는 반응을 했을 때 베드로는 명확하게 선포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여기에 기독교의 핵심단어 ‘회개’, ‘세례’ ‘죄사함’, ‘성령’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어찌할꼬 하는 그들에게 첫 번째로 하는 말이 “회개하라” 였습니다. 베드로는 돌려서 말하지 않고 아주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회개하라는 메시지는 오래 전에 세례 요한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것은 구약시대의 마지막이자 신약시대를 여는 과정에서 세례 요한의 역할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마치 다른 메시지가 없는 것처럼 올곧게 회개를 말합니다. 그 당시 백성들도 회개를 촉구할 때 모두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회개를 선포하다가 헤롯왕에게 목 베여 죽습니다. 회개의 설교를 하는 것은 자칫 위험한 일입니다. 환영 받을 수 없는 설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도 환영 받지 못하는 설교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첫 메시지도 ‘회개’였습니다. 예수님이나 세례요한, 베드로나 바울의 설교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핵심이 회개였습니다. 왜 그렇게 회개를 핵심으로 다루었을까요? 회개를 다루지 않고는 신앙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 없는 신앙, 회개 없는 구원이 가능합니까? 죄에 대한 심각한 결단이 없는 사람이 십자가의 예수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통과하려면 회개를 거쳐야 합니다. 회개는 끔찍한 죄 앞에서 몸서리를 치는 경험을 하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다가오는 구원의 빛,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안타까운 것은 유사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입니다. 사이비, 가짜에 대한 폐해와 심각성을 요즘 사회적으로도 많이 보게 됩니다. 이것은 한 개인 뿐 아니라 국가에 미치는 영향도 큽니다. 이렇게 사이비 종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비 그리스도인들도 문제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유사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신자가 아닌데 신자인 것처럼 하는, 진리가 전혀 심장을 관통하지 않은, 복음을 경험하지 않아 신앙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신앙인인 것처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유사 그리스도인들은 회개에 관심이 없습니다. 죄 문제 앞에 직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전혀 보지 못했고 십자가는 나와 상관이 없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정확하게 너희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그 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죄 없으신 그분을 십자가에 매단 사건에 가해자가 ‘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은 보통 죄가 아닙니다. 마음이 찔려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