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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사람 치유의 목적은 다음과 같이 3가지 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6.07.27 / 조회수 : 2304

내적 치유 사역

 

 

제1장 성경이 말하는 치유

 

성경은 치유(healing)란 말을 다양한 단어로 사용한다.

 

1. 치유와 관련된 단어들

 

◈ 세라퓨오

주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육체적인 병을 치유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마 4:23; 8:7,16 등).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 이아오마이

육신적인 병은 물론(마 15:28), 마음이나 영적인 병은 물론 축사로 치유하는 것을 말한다(마 13:15; 눅 4:18; 요 12:40; 행 10:38; 히 12:3; 벧전 2:24; 약 5:16 등).

“(수르보니게 여인의 딸)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8).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5).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 소조

‘구원하다’(마1:21; 18:11), ‘위험에서 건져내다’(마 8:25; 14:30), ‘치유하다’ 또는 ‘온전하게 하다’(막 5:23; 6:56), ‘귀신 들린 자가 깨끗함을 받다’(눅 8:36).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회당장 야리로의 딸)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막 5:23).

 

◈ 구약의 라파

‘원 상태로 회복하다’(창 20:17; 시 6:2; 렘 17:14), ‘사람의 병’(출 15:26; 왕하 2:22), ‘나라의 죄악이 치유 받다’(대하 7:14; 호 6:1; 렘 3:17),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

 

2. 성경이 말하는 치유

 

이상 단어 연구에서 본 바와 같이 성경은 치유라는 말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치유는 5가지로 나눌 수 있다.

 

◈ 영적 치유(spiritual healing)

죄인이 구원 받아 영혼이 치유 받는 것을 말한다(마 1:21; 13:15;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 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시 41:4).

 

◈ 육신 치유(physical healing)

육신의 질병이 치유 받는 것을 말한다(마 4:23; 고전 12:9; 약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 심령 치유 또는 내적 치유(emotional healing, inner healing)

사람의 마음이 치유 받는 것(사 61:1-3; 눅 4:18-19; 마 12:20).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사 61:1-3),

육체의 질병의 70%가 마음의 질병에서 기인하는 심인성 질병임을 감안할 때 내적 치유는 육체의 치유 못지않게 중요하다.

 

◈ 축사 또는 축귀(deliverance)

귀신을 쫓는 것(막 16:17; 눅 10:19; 행 10:38)도 치유 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막 16:17).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귀신 들린) 딸이 나으니라.”(마 15:28).

 

◈ 죽은 자를 살림

성경에는 죽은 자를 살린 기록이 가끔 나온다.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왕상 17:22), 직원의 죽은 딸을 살리시고(마 9:18-24),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요 11:43-44), 죽은 도르가를 살린 베드로(행 9:36-40 ), 졸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린 바울의 경우(행 20:9-10)를 들 수 있다.

 

오늘날의 경우, 영국의 배관공 출신의 능력 사역자인 스미스 위글워쓰 목사는 그의 집회에 오랫동안 참석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할 때 죽은 자를 최소 10명이상은 살렸다고 하며, 인도네시아에 임한 부흥기간 중, 죽은 사람의 시신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찬양을 드렸을 때 그 사람이 살아났다고 증언한다.

 

 

 

 

 

 

 

 

 

 

 

 

 

제2장 내적 치유란 무엇인가?

 

 

내적 치유는 과거에 발생했던 좋지 못한 사건의 기억이나 어린 시절에 우리가 당한 상처 혹은 과거에 지은 특정한 죄 등이 감정적 혹은 정신적인 병의 원인을 치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적 치유'를 '과거의 상처의 치유'(Healing of Past Hurts)혹은 '깊은 차원의 치유' 또는 '기억의 치유'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쓰라린 과거 기억을 포함한 정서적 심리적인 상처들은 우리 자신이 저지른 죄악 또는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인한 피해 때문에 생기게 된다. 이러한 과거 상처들이 치유되면 속사람(Inner Man)이 과거의 감정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때 회복된다. 따라서 과거에 받은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신체적이고도 가시적인 치유와 축사사역과는 완전히 분리될 수 없으나 분명하게 구별되는 개념으로써 일반적으로 내적 치유(Inner Healing)라고 불리고 있다.

 

지금은 내적 치유 사역으로 널리 알려진 내적 사역자들이 말하는 내적 치유의 정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데이빗 시멘즈(David A. Seamands)는 “내적 치유란 상처받은 감정과 치유되지 못한 기억들을 목회적인 차원에서 돌보아 주고 그 치유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내적 치유에 대해 "성령의 치유 능력을 특정한 형태의 감정적 영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기독교 상담과 치유 기도의 한 가지 형태이다. 내적치유사역은 그러한 사역 중 하나의 사역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한 사역의 유일한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지나친 강조는 과장과 오용을 낳기 때문이다" 이라고 했다.

 

그 분야의 또 다른 선구자인 존(John)과 폴라 샌포드(Paula Sandford)는 'The Transformation of the Inner Man'에서, 내적 치유 사역을 속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속사람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사역으로 이해하고 있다.

베티 탭스코트(Betty Tapscott)는 내적 치유를 이렇게 정의한다. "내적 치유는 속사람 즉 마음, 감정, 괴로운 기억, 꿈 등을 치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도를 통한 과정으로써 그것을 통해 우리는 원망, 자기 부정, 자기 동정, 우울, 죄책감, 두려움, 슬픔, 미움, 열등감, 정죄, 무가치 등의 감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적 치유의 권위자인 찰스 H. 크래프트( Charles H. Craft)는 "내적 치유 사역은 전인적인 치유를 목적으로 하여 성령의 능력을 통한 사역이다. 인간의 질병은 대체로 감정적 영적인 부분에 입은 상처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내적 치유는 그곳에 초점을 맞춘다. 이 사역은 그러한 상처의 근원이 되는 부분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적용하려 한다. 흔히 내담자의 기억에는 이러한 근원적인 것들이 무의식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에, 내적 치유는 때로 '기억의 치유'라고 불리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내담자를 치유하면서 흔히 당면하게 되는 구체적 문제는 용서하지 않음, 분노, 원망, 거부, 자부심의 결여, 두려움, 걱정, 성적인 문제 등이다"라고 말한다.

리타 베네트(Rita Bennett)는 "내적 치유란 간단히 말해서 성령의 역사를 저해하고 있는 요인들을 치유함과 동시에, 그것들을 우리의 심리적인 본성으로부터 제거해 버리는 일을 주님과 협력하여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세계적인 치유사역자인 존 윔버(John. Wimber)는 "내적 치유란 손상된 감정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죄와 용서와 정서적인 회복을 이루어 주시는 과정으로서, 곤경에 빠져있는 우리의 존재와 삶의 영역에 복음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적 치유는 속사람의 치유로서 정신(Mind), 의지(Will), 마음(Heart)과 관련된 모든 부분의 영역의 치유를 포함한다.

또한 우리의 감정(Emotions), 영혼(Psyche, Soul or Spirit)과 관련된 부분의 영역의 치유도 포함한다. 한편 영적인 병은 우리가 행한 것에 의해 기인하지만, 감정적인 병은 우리가 당한 것 혹은 일어난 사건에 의해 발생한다. 즉 과거에 우리가 이러한 상처는 나쁜 추억 혹은 연약한 혹은 상처받은 감정의 형태로써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괴롭힌다. 또한 이러한 상처는 우리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문제 가운데로 몰아넣는다.

 

지금까지의 내적 치유 정의를 종합적으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내적 치유는 해방되는 것이다. 과거의 마음의 상처로부터 해방되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한다.

 

둘째, 내적 치유는 바르게 하는 것이다. 내적 치유란, 상처받은 사람들이 받는 상처에 대해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도록 성경적이고 영적인 통찰력을 갖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셋째, 내적 치유는 과거의 사건을 재조명하는 것이다. 재조명이란,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을 말한다.

 

넷째, 내적 치유는 바꾸는 것이다. 내적 치유 사역에서는 환자의 과거의 부정적인 결과를 제거해주시고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예수님께 기도한다. 여기서 과거의 사건 자체를 변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결과를 바꾸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다섯째, 내적 치유는 보통 한 사건 이상의 과정이다. 우리의 기억들은 마치 양파 껍질처럼 여러 겹으로 형성되어 있다, 양파의 겉껍질을 벗기면 다음 껍질이 있듯이 우리의 기억들은 겹겹이 연결되어 한 단계의 치유가 끝나면 다음 단계로 이어지게 된다.

때때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그릇을 꺼내려면 먼저 찬장문을 열어야 하듯 내적 치유에서도 문제에 맞는 과정을 잘 파악해야 한다. 예들 들면 상처받은 사람에게 내적 치유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적 치유는 각각 개인의 시간대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내적 치유는 기억의 치유이다. 보통 사건 자체는 한 번의 상처를 입히지만 그 사건이 계속 상처를 주게 된다. 실로 기억은 강한 힘이 있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어느 정도 기억의 고통을 무디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그것을 완전히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일곱째, 내적 치유는 용서를 적용하는 것이다. 많은 영적 훈련들이 우리가 미처 인격의 깊은 부분을 변화시키기도 전에 급히 진행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예수님의 임재와 용서와 무한한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상처받은 자아상에 새겨진 아픔의 흔적들을 치유 받은 경험의 과정은 고백과 용서이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내적으로 체험할 충분할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내적 치유의 참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여덟째, 내적 치유는 접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던 과거의 시간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나게 하는 은혜의 수단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그 때 엎질러졌던 우유까지도 해결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이시며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분이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와 은혜를 받아들인다면, 과거의 고통스런 사건은 더 이상 현재의 우리를 속박하거나 상처를 주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적 치유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역사 하시는 주님의 원동력이며 적용 방법이다. 원동력은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적용 방법은 실제 사역 현장에서 성령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 치유란 주 예수님이 과거의 상처들을 해결하시도록 그 분께 의탁 드리며 그 상처의 부정적인 결과들을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1. 내적 치유란?

"그가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마 8:17)

과연 여기서 '연약한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오는 말씀이다. 그 중 특히 "자신도 모르는 잘못된 굴레"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

1) '상처 난 감정' 의 증거

• 지나친 완전주의자 (Perfectionist Complex) "나는 이것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저것을 할 수 있었는데, 내가 좀 더 잘 해야 하는데..." 즉, 계속 노력하고 이루지만 결코 목표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 지나친 예민감 (Supersensitivity) 다른 이들로 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고(남의 말에 지나치게 의존함), 잘못된 것에 지나치게 자신을 결부 시키며 결국 상처를 받는다.

•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 따라서 아주 간단한 돌파구를 찾는데 바로 경주에 절대 나가지 않고 옆자리에만 앉아 있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할 일이 있다.

• 문제를 똑바로 직시해야 된다. 문제를 혼자만을 생각으로 풀려고 하면 안 되고 무엇이 문제인지 직시해야 된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고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약 5:16)

• 어떤 문제이든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된다. 자신의 책임을 시인하기 전엔 상한 감정의 치유가 시작 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 고침을 받기 원하는지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 문제 가운데 연관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야 된다.

• 자신을 용서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죄를 잊어 버리셨다.

•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 또한 그것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을 성령님께 구해야 한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기도할 것을 아시고 기도해 주실 것이다.

 

2. 성령과 치유

신유의 정의

신유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는 은혜를 말한다. 순간의 치유와 점진적 치유가 있다.

① 신유는 의약적 치료(Medical Cure)가 아니다.

② 신유는 최면술적 치료나 정신력 또는 기(氣)에 의한 치유가 아니다.

③ 신유는 무당의 신통술이나 강신술이 아니다.

④ 신유는 믿음이나 기도 그 자체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⑤ 신유는 육체적으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⑥ 신유는 돈을 목적으로 한 의학적 직업이 아니다.

신유의 약속과 비전

① 치유의 다양성을 인정하자.

하나님께 열린 마음으로 상황, 대상, 질병의 종류에 따라 어떻게 사역을 해야 할지 하나님께 음성을 들으면서 치유사역을 행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성령께서 직접 치유하실 수 있도록 하며, 우리는 그 보조자로서 사역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방법을 제한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② 신유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소유하자.

[출15:26]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신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 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말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막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약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행19: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제3장 능력치유(Power Healing)

 

하나님은 치유능력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고자 하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치유 은사가 있는 이가 있어서 삶 가운데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치유사역을 하시길 원하십니다. 실제로 특별한 은사가 없어도 전도할 수 있는 것처럼 특별한 치유 은사 없어도 치유사역은 할 수 있습니다. 치유의 기도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사역을 위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시길 바랍니다. 치유사역자가 되려는 소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치유 사역자가 되어 병자의 형편을 듣고 병자를 위하여 간구하고 치유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1.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주님이 부여한 동기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동기를 두었습니다. 사역은 오락이 아닙니다. 병자에게 어떤 깊은 인상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Show가 아닙니다. 치유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이해하고 감동받아야 합니다. 치유사역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2.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할 것을 모두 배우십시오.

배울 것이 많습니다. 기도는 간단한 것 같으나 기도해보면 그것이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고로 치유사역을 위하여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공부합시다. 성경 전반에 걸쳐 치유의 내용을 깊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의 치유사역을 공부합시다. 그리고 최근의 믿을 만한 학자들의 책자들을 통하여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 들 중에 프란시스 맥너트의 "Power to heal",

존 윔버의 "능력전도" "능력치유"

켄 불루의 "치유사역"

M.T 겔시의 "치유와 기독교"

“능력전도” 끝부분에 신유사역의 성공적인 역사가 나와 있고 능력치유에 그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3.훈련 받을 기회를 많이 찾고 구하십시오.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훈련하셨습니다. 배우는 것이 중요하지만 훈련가운데 얻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절로 치유사역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치유사역자는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훈련받을 기회가 있으면 어떤 기회이든지 최선을 다하여 참석하여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여 훈련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4.성령께서 매일 매일 새롭게 하시길 기도하십시오.

치유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병을 우리가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고로 그분이 어떻게 계속 역사하시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치유를 경험합니다.

매일매일 치유를 위하여 당신은 성령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인도함을 느낍니까? 음성을 듣고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능력과 은사를 경험하여도 보혜사로 인도받고 그 같은 경험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느끼고 인도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5.나서서 병자를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위험을 감수하십시오. 큰 대적은 불신앙입니다. 두려움입니다. 불신은 하나님의 능력을 막습니다. 두려움은 주어진 은사를 막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느냐? 하십니다.

믿음이 있으면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막9:23) 믿음을 가지고 실제로 나가서 그 일을 행하여야 합니다. 병자를 고치는 것은 열정이 담긴 사랑 입니다.실로 구원과 치유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포로 된 자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구원이 주님의 사역이십니다. 공생애시 치유사역의 대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12제자와 70명의 제자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렇게 행하시길 원하십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이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있습니다. 누가 일군입니까? 바로 당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고 죽은 자를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시간부터 더욱더 하나님의 음성을 감지하시고 병자의 형편을 이해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열정을 가지고 치유사역에 임하시길 바랍니다.

 

받아들이라!

 

'받아들이라' 여러분 어떻습니까? 지금 만나는 중에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 그 상황들, 나와는 다른 기질의 사람들, '하나님, 난 이런 사람과는 일 못해요' 하는 사람들, '난 그곳은 가지 못해요'하는 사역지들 나와 다른 면을 지닌 사람들을 한국 사람들은 참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죠. 외국에 나가보면, 다인종 사회라 다른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용인이 쉬운데, 한국은 단일민족의 획일적인 문화 전통이 있어 이 받아들임이 참 어려운 환경입니다.

 

그래, '다른' 것이야 주의 이름으로 용납한다지만, 그럼 '틀린' 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앙인의 양심 상 틀리다고 판단된 것, 그렇다고 배운 건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처음으로 맞은 여리고 성, 그 성을 점령한 방법은 그저 도는 것이었죠. 하나님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전략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여 성이 무너진 것이죠.

그런데 바로 다음 아이 성 전투는 어떠합니까? 아간의 죄로 인하여 패배당하고 맙니다. 그는 '틀린', 틀려먹은 인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를 이스라엘 전체가 받아들일 공동의 문제, 공공의 죄로 알게 하십니다. 그런 틀려먹은 것도 역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아간은 갑자기 나타난 인물이 아니죠. 애굽 노예 때도, 출애굽 때도, 광야 때도, 이스라엘 안에 그와 같은 성향은 계속 있었습니다. 다름을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방법을 알았다면, 틀림을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했듯이 성도는 세상과 구별된 자들입니다. 거룩이 무엇입니까? 세상과의 구별, 성별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는 소극적 의미의 거룩입니다. 거룩의 본질은 그렇게 구별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자리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세상과 구별된 삶이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는 삶이 될 때, 거룩의 적극적 의미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룩한,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세상은 어떠합니까? 세상 속의 우리들은요? 세상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사라지고, 기준점이 흔들려 양 갈래로 왔다 갔다 합니다. 그것이 애굽의 노예근성과 바로의 폭군 근성입니다. 보상 심리와 보복 조치입니다. 프로이드의 ‘에로스’(성 본능)와 ‘타나토스’(공격성, 자기 파괴)입니다. 자살심리와 적대 심리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무슨 일을 하면, 세상 사람들은 보상을 바라거나, 보복이 두려워 일을 합니다. 자기를 부정해서 죽거나, 남을 부정해서 죽이거나 입니다.

 

제4장 속사람의 치유

욥기 17장 1절에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예비 되었구나!”고 했습니다. 성경 원어에 보면 ‘내 영이 상했다. 깨졌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난 정말 죽고 싶다. 나의 날이 다 하였다.’ 이것은 정말 실제적인 경험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한 심령 속에 살게 되면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상한 심령이 우리 안에 오게 됩니까? 잠언 15장 13절에“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어떤 때 슬픔을 느낀다.’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것입니다.

상한 심령은 나쁜 뿌리가 자라게 하는 기반입니다. 상한 심령은 바닥이 없는 컵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상한 심령을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여신다면 그 과정이 아주 빠르게 될 수 있습니다.

시편 62편 8절에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시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토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장 15절에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토한 것뿐이오니”라고 했습니다. 한나는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다 토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물 쏟듯 하나님 앞에 쏟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든 아픔을 하나님 앞에 물 쏟듯 쏟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픈 마음을 치유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상한 마음일지라도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육체의 질병은 의사의 지시에 따라 약물로 치유할 수 있지만 속사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료 행위로는 치유하기 어렵다. 속사람 즉 마음의 치유는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리려는 정신적 또는 영적인 행위인 것이다.

똑같이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도, 한 부류의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 속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가운데 영적인 성장을 지속해 나가는 반면, 다른 한 부류의 사람은 그렇지 못하고, 믿음을 갖기 시작한 이후 어느 정도는 잘 자라가다가 어느 시점에 가서는 성장을 멈춰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이들은 한 때 열정적으로 주님을 섬겼고, 신앙 체험도 하였지만, 이상하게 의기소침해지고 특별한 이유 없이 영적 침체에 빠진다. 이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이것은 오히려 공로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며, 다른 교인들과 목회자에게 상처를 주고, 심지어 교회의 분열의 주동자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해결되지 않은 상처는 그를 불행하게

만들고, 다른 교인들과 목회자와 교회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우리 한국교회는 이런 문제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성경공부 잘하고 열심히 기도만 하면 이런 정서적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처럼 생각하였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쓴 뿌리가 되어 본인은 물론, 그가 속한 가정과 교회를 병들게 한다.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고, 목회자들이 속사람 치유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목회 현장에서 속사람 치유 사역을 행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코자 하며, 이를 위해 먼저 속사람 치유의 일반적 이해를 살펴보고, 속사람 치유가 목회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고자 한다.

 

1.속사람 치유에 대한 일반적 이해

 

1)속사람 치유의 정의

속사람 치유는 어떤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관념적인 개념일 수 있다.

속사람 치유 사역자마다 그것에 대한 정의와 강조점이 다르다.

“단순히 과거에 받은 상처를 위로하거나 어두운 기억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성령과 복음의 능력 안에서, 성경적인 원리와 방법들을 통해서,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사건으로부터 해방되고 회복되며, 마음이 새롭게 됨으로써 점점 성화되어 가는 것을 돕는 치유 사역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2)속사람 치유의 목적

속사람 치유의 목적은 다음과 같이 3가지 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과거의 고통스럽고 어두운 기억이나 사건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된 아픔과 억압에서 해방되어,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으로 회복시켜 주는 데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속사람의 상처로 인한 가장 흔한 결과는, 특히 그것이 어린 시절에 받은 것이라면, 정서적인 성장이 멈추는 것이다.

우리는 신체적으로, 지적으로,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계속 성장할 수 있지만, 우리 정서적인 발전의 어떤 부분은 여전히 미성숙한 상태로 묶여 있을 수 있다.

속사람 치유를 통해 이런 정서적 성장의 장애 요인들을 제거함으로 정서적인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 창세기 1:27에 나온 대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내면에서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 목적을 이루어 나가고 계신다.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왜곡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그의 눈이 바로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모습이 결코 바르게 이해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이루어 질 수 없다. 속사람 치유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막고 있는 마음의 상처들을 제거해 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일을 도와준다.

마지막으로, 속사람 치유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도록, 그래서 하나님의 영역 주권을 회복시키는 건강한 도구가 되도록 속사람을 옥토 밭으로 가꾸는 작업인 것이다.

속사람 치유를 통해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 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딤후 2:3)로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속사람 치유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상처로 인한 고통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어 정서적인 회복을 가져오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막고 있던 상한 마음을 치유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며, 우리의 속사람을 건강하게 만들어 줌으로써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기여하게 하는데 있다.

한 마디로, 그 목적은 영적 성숙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3)속사람 치유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감정을 치유하시는데 관심을 갖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어두움에 숨겨진 것을 아시고(시 139:11-12, 단 2:22) 사람의 영혼과 마음에서 나오는 것(막 7:21-23)을 아신다.

그 분이 그렇게도 애타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는” 것이다(사 25:8). 그 분은 “상한 심령을 고치시려고”(사 61:1, 눅 4:18)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던”(사 53:3,4) 분이다.

그 분은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 주셨다.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 그 분은 우리를 모든 두려움에서 건지시리라고 약속하셨다(시 34:4).

이것을 잘 알았던 바울 사도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고 권면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망은 예수님의 사역과 생애에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들이나 죄인, 부정하고 버림 받은 사람들을 대하실 때 육체의 질병뿐 아니라 감정적인 상처들도 치유해 주셨던 것을 볼 수 있다. 문둥병자는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있을 때 “부정하다!”고 외침으로 다른 사람이 근접치 못하도록 하였으며, 그로 인한 감정적 상처는 분명 육체적 아픔 만큼 심했을 것이다. 문둥병자는 부정(不淨)한 자로 간주되어 버림받음, 거부, 미움, 분노, 조롱, 학대 등을 견뎌야만 했으므로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자기 증오, 열등의식, 절망 그리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깊은 분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문둥병자들의 육체 뿐 아니라 깊은 내면의 상처들도 치유하기 원하셨기 때문에 그를 만져 낫게 하시고 제사장에게 보내어 그 병이 치유된 것을 증명하게 하심으로 앞으로 사회생활에 온전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이다(막 1:40- 45).

이와 같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당신의 백성들의 상처 난 마음이 온전히 치유받기를 원하시는지, 즉 속 사람 치유에 대한 주님의 열심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의 뜻이며, 오늘날 목회의 현장에서도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2.속사람 치유가 목회에 미치는 영향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이웃, 환경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는 이러한 관계들을 왜곡시키고 막고 있는 상한 마음을 치유함으로써 각각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그 회복된 관계들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영적 성숙을 가져오게 한다.

 

1)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상한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의 결여를 가져온다. 왜곡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그의 눈이 바로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모습이 결코 바르게 이해되지 못한다. 입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많은 말을 할 수 있지만, 깊은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해 가지는 인상은 심히 부정적이다.

또한,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은 영적 삶에 있어서 심한 굴곡과 침체를 겪는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신앙의 태도가 항상 주변의 상황에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심한 굴곡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신앙 연수가 오래되었는데도 생활 속에 어려움이 생기면 항상 근본적인 회의에 빠져서 하나님이 계신 것인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등의 유아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은혜와 체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에 묶여 있고, 하나님에 대해 왜곡된 생각을 하게 된다거나, 삶 속에서 고쳐지지 않는 죄의 습관을 지속해 나가는 부분이 공존한다. 가장 무섭고 심각한 것은 불신이다. 죄로 인해 상한 마음 중에서도 버림받은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끊임없는 욕심으로 세상을 향해, 우상을 향해 달려간다. 결국 하나님을 불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마음의 상처는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일으켜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시키게 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차단하여 개인의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철저히 방해하는데, 이는 바로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물론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과의 친밀감 있는 교제가 가능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 개인의 영적 성숙을 가져오게 한다.

 

2)자기 자신과의 관계 회복

죄로 인해 깨지고 상한 마음의 내적 질병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참 자아를 잃어버리게 한다. 그래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한다. 계속적인 근심과 걱정을 안고 있으며 자신을 부적합하게 여기며 열등감을 갖게 된다. 자기에 대한 올바른 자아 개념을 갖지 못하면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신앙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마음의 상처로 인한 이러한 현상은 자신에 대한 자존감 결여로 나타난다. 자존감의 결여에는 두려움, 의심, 분노, 악심, 걱정 그리고 죄책감 등이 해당된다.

이러한 자존감 결여는 열등감과 부족하게 느끼는 것과 자신의 가치를 무시하는 감정들을 갖게 하여 놀라운 영적 경험과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속박한다. 그 결과 우리의 생활을 실패와 패배로 이끌어 간다. 자존감이 결여는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키고, 꿈과 이상을 파괴시킨다.

상하고 포로 된 마음이 더 심한 병적 상태로 빠지게 되면 갇힌 마음이 된다. 이는 내적 질병의 최종적인 상태로써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우리의 영혼과 영적 자아가 억눌림과 자기 학대를 통해 갇혀지는 것이다. 이 갇힌 마음의 외적 증거의 하나가 완벽주의이다. 지나친 완벽주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평강의 누림을 빼앗아 가고, 무엇인가에 쫓기며 많은 패배감을 경험하게 한다.

이렇듯 상한 마음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 면에서도, 한 개인을 병적인 상태가 되게 하여 무기력하게 만들고 철저히 속박하여,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한 삶에서 누리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속사람 치유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회복되면,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과 인식의 확장 현상이 나타난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사랑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신의 존재 인식과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의 양식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의 성숙과 직결된다.

 

3)이웃과 환경과의 관계 회복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대인 관계의 영역에 있어서도 큰 어려움이 있다. 지배하려거나 소유하려는 태도가 있을 수 있고 반면에 극도로 의존하는 경향도 있다. 지배하는 사람의 경우, 모든 상황을 자신이 왕처럼 지배하려 하고 모든 것을 간섭하려고 한다. 지나친 의존의 모습의 경우에는, 자신의 뜻과 생각은 아무 것도 없고, 지극히 피동적인 삶을 나타내게 된다.

또한, 감정이 오랫동안 억눌려 있음으로 해서 상한 마음을 갖고 있을 경우에는 마음에 벽이 생긴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과 감정을 주고받지도 못하고 자기 얘기만 늘어놓는 사람이 되고 만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자신 안에 들어 있는 감정을 스스로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어려운 시절을 보낸 많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바로 감정이 속으로 숨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 결과 깊이 잠재해 버린 감정이 다시 살아나지 않아 상담도 불가능하게 된다. 이렇게 마음의 상처로 인해 감정이 죽어버린 사람은 말하거나 행동할 때 생명력도 없다. 감정은 상호작용하면서 역사를 일으키는 것인데, 그런 사람들은 감정이 죽어 버려서 누구와도 감정적인 상호 작용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속사람이 병든 사람은 사회생활과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랑을 주고받는데 큰 장애를 일으키며 사회 공동체와 사회 구조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그 곳을 병들게 하며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또한 자연 생태계에 대한 바른 지식의 결여로 자연 생태계까지도 병들게 하여 결국 그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오게 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속사람 치유는 존재와 생활양식에서의 자신과의 관계성 회복을 가져오는데, 이것은 다시 이웃사랑의 관계로 발전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섬길 수 있게 되며, 하나님의 동역자(고전 3:9)로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기쁨으로 헌신하는 성숙한 삶이 가능하게 된다. 이렇게 성도 개인에게 있어 속사람 치유는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그리고 이웃 및 환경과의 관계에서의 회복과 성장을 가져오게 되어, 결과적으로 성도 개인의 영적 성숙을 돕게 된다.

 

3.가정 회복과 속사람 치유

 

가정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와 함께 시작된 기관으로 하나님께서 결혼을 통하여 허락하신 기관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자연을 다스리는 삶에 축복하시기 위하여 가정을 만드셨다(창 1:28-29).

시 133편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가정에 대하여 선하고 아름답다고 찬양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영생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가정이 오늘날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가정 폭력, 자녀 학대, 이혼율 증가 등으로 날로 상처로 얼룩져 있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가정도 속사람 치유를 통해 회복될 수 있다.

 

1)역기능 가정의 치유

오늘날 상처투성이인 가정을 한 마디로 ‘역기능 가정’(dis-functional family)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역기능 가정’이란 사람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체적인 욕구와 정서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가정을 말하는데, 이것은 역기능적 결혼에 의해 만들어진다. 비정상적 부부관계는 병적인 부모 자녀 관계로 나타나는 것이다.

역기능 가정이란 원래 알코올 중독자 가정에만 적용되었던 말로써, 이제는 도박꾼, 과식 및 거식으로 나타나는 섭식 중독자, 이단이나 병적인 신앙생활에 심취하는 종교 중독자, 분노 중독자, 성 중독자, 충동구매 중독자, 일 중독자가 있는 가정에도 적용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상호 복종적인 동반자 부부관계(엡 5:21)보다는 가부장적 가족 문화에서 충효를 절대 가치로 가르치며 남존여비를 근간으로 삼았던 수직 윤리의 유교 문화, 일제 36년간의 억압, 6.25전쟁의 상흔, 그리고 고질적인 가난은 갖가지 역기능적 요인을 잉태하여 가정과 사회 전체를 역기능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역기능 가정의 특징은,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며, 감정표현이 제한되며, 명백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놓고 말할 수가 없고, 자녀들로 하여금 부정적인 역할을 하게 만들며, 자녀들의 성장을 위해서 적절한 보살핌을 제공하지 못하고 바깥 세상에 대해서 폐쇄적인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는 역기능 가정을 속사람 치유 개념을 기초로 한 여러 가지 치유 모델들을(예를 들면, 가족 치유 등) 통해서 치유함으로써, 각 가정이 창조 당시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정상적인 가정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2)성인 아이의 치유

앞에서 살펴 본 역기능 가정은 ‘성인 아이’(adult child) 낳게 된다.

성인 아이란 역 기능 가정의 산물로써 성인의 문제를 나이에 맞지 않게 조숙하게 다루어야 하는 ‘성인화 된 아이’(adultified child)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해소되지 않은 어린 시절의 문제(unfinished business: 미완성 과업)를 아직 처리하고 있는 18세 이상의 성인을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되고 있다.

성인 아이들은 가정에서 가족들 간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 자아 정체감을 형성하지 못했으며, 어린 시절의 가정에서 위로 받거나 충족 받지 못한 결과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감정과 행동들 가운데는 많은 부분이 유년기 흔적이 남아있다. 그 결과 이들에게는 여러 가지 증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성인 아이에게 나타나는 증상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소외감’을 들 수 있다. 성인 아이는 항상 자신이 남과 다르다고 느끼며 무엇이 정상적인 행동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며 친밀한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둘째, ‘자기 정죄’로써, 자신을 무자비하게 비판하고 끊임없이 인정과 칭찬을 원하며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에게도 충성한다.

셋째, ‘긴장감’을 들 수 있는데, 재미있는 시간을 갖는데 어려움을 느끼며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어떤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추구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넷째, ‘불신’이다. 병이나 퇴직과 같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변화에 과민 반응을 보이며 아무런 대책 없이 결과를 고려하지도 않고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마지막으로, ‘지나침’을 들 수 있다. 성인 아이들은 ‘지나침’과 익숙하여서 지나치게 성취하려 하고, 지나치게 먹고, 지나치게 일하고, 지나치게 운동하며, 지나치게 소비한다. 그들은 섹스, 고통, 음식, 신앙, 권력, 돈, 소비 등 무언가에 중독이 되려한다. 성인 아이의 더 큰 문제점은 그가 성장하여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었을 때, 그는 다시 역기능 가정을 만들 수밖에 없고 그 역기능 가정을 통해 다시 성인 아이를 배출하게 됨으로써 역기능의 고리가 계속 연결된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이런 성인 아이도 속사람 치유를 통해 치유 받음으로써 성인 아이 본인이 회복됨을 물론, 회복된 그를 통해 그의 가정도 역기능의 고리를 끊고 온전히 회복되어 창조 당시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가정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3)교회 성장과 속사람 치유

교회 성장은 하나님의 뜻이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마 28:19-20)을 교회에 위임하셨다.

그러므로 교회 성장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며, 목회사역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인 것이다.

속사람 치유 사역은 교회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3가지 측면에서 말할 수 있다.

 

a)구원받은 백성의 증가와 속사람 치유

속사람 치유는 구원받은 백성을 증가시키는 사역이라는 점에서 교회성장을 돕는다. 인간 역사의 왜곡과 영혼의 본질적 그릇됨은 죄의 결과이며, 그 주역은 사단이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으로 인하여 이 세상은 사단의 지배 아래 있으며, 이 사단의 권세는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상을 총체적으로 왜곡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상의 상처와 이로 인해 파생되는 질병은 사단적인 특성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 M. Green은 질병과 사망은 마귀가 자기의 유혹에 응해 준 대가로 인간에게 준 사악한 선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사람은 누구든지 정신적인 문제에 연관되어 있으며 영혼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자신의 정신적인 생활을 먼저 개선하지 아니하면 육신의 개혁을 기대할 수 없으며, 영혼이 치유되지 않는 한 정신의 개혁은 일어날 수 없다.

터너(John Turner)는 육체적 질병의 50%가 감정적, 정신적, 영적, 내적 스트레스와 긴장에서 온다고 하였고, 맥너트(Mcnutt)도 우리의 육체와 정신, 영적 건강 사이에는 깊은 상호 관련성이 있으며 어떤 질병은 근심과 고뇌의 뿌리가 기도를 통해 제거될 때 깨끗이 사라진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인간 이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몸과 마음과 영으로 구성되는 분리할 수 없는 전인(살 5:23, 히 4:12)으로서 영과 육과 마음이 서로 연관성을 가진 뿌리인 상한 마음에 대한 속사람 치유는 왜곡된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런 상태보다 더욱 나아지는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치유 대상을 단순히 육체적 질병으로만 국한시켜서는 안 되며 왜곡된 내면의 세계와 영혼 전체를 포함하는 전인적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교회 성장이 내적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날마다 더하게 하는 것이라면 온전케 되는 전인적인 인간을 날마다 더하게 하는 속사람 치유 사역이야말로 교회 성장을 위한 사역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속사람 치유는 치유 자체에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자아, 온전한 영혼을 지향하는 전인적인 구원을 그 목표로 삼고 있으며, 이 사역을 통한 치유가 계속될 때 날마다 구원받은 백성을 더하게 할 것이므로, 교회 성장을 돕는 사역인 것이다.

 

b)복음 증거의 주역들의 역동성 강화와 속사람 치유

이는 복음을 증거하는 주역들의 역동성을 강화시켜 주므로, 이것은 교회 성장에 도움을 준다.

건강한 사람만이 일을 할 수 있다. 마음이 유약한 사람, 열등감에 시달리고 낮은 자존감으로 방황하는 사람은 복음의 자신 있는 전파자는 될 수가 없다. 또 이런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가 부흥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실제로 부흥하는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 복음의 뜨거운 열정과 복음에 관한 한 높은 자존감이 가득찬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복음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는 신학적인 훈련의 미숙에도 그 원인이 있지만 전도자의 인성에도 적지 않은 요인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소극적인 자신감의 결여는 많은 요인이 과거에 입은 내면의 상처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데이빗 A. 씨맨즈 박사는 그의 책 『상한 감정의 치유』에서 낮은 자존감은 자신의 잠재력을 마비시킨다고 말했다.

이것은 복음전파를 위해 역동성을 강화시킴에 있어서 속사람 치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충분히 보여 주는 것이다.

과거에 받은 내면의 상처들, 죄책감과 열등감에서 해방되지 못한 마음은 결코 교회 성장을 위한 사역자로서는 적합하지 않다. 위대한 전도자, 선지자, 그 외의 많은 복음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부름에 앞서 죄책감과 열등감에서 자유 함을 받는 경험이 바로 이 점을 증명해 주고 있다. 교회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에 앞서 하나님이 관심을 갖는 부분은 상한 심령의 치유라고 생각한다. 즉 상한 심령의 치유야말로 교회 성장의 역동성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속사람 치유는 교회 성장의 주역들의 역동성을 강화시켜 줌으로써 교회 성장에 도움을 준다.

 

c)사역자 양성 훈련과 속사람 치유

속사람 치유 사역은 진정한 사역자를 양성하는 훈련이라는 점에서 또한 교회 성장을 돕는다.

우리는 앞에서 치유 사역이 구원 받은 백성을 증가시켜 교회를 성장케 하는 역동성을 강화시켜 주는 사역임을 역설하였다.

그렇다면 이 사역을 수행하는 요원을 양성한다는 것은 보다 더 근본적인 목표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목적 중의 하나는 혼자 건강하여 즐겁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가는 군사와 병기가 되는데 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치유를 받게 되면 반드시 사역에 관심을 갖고 헌신하게 된다. 그래서 이는 어떤 측면에서는 헌신자들을 위한 사역 프로그램일 수도 있다. 이를 위해 더 깊은 치유의 경험이 필요하고 또 치유의 강도가 깊어질수록 사역에 대한 헌신도가 높아지게 된다. 다시 말해 이는 스스로 치유를 경험한 사람이 또 다른 치유 사역자를 배출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며, 하나님 치유 능력의 최대 승리로 간주한다. 즉, 상처 입은 자신의 상태를 치유의 원천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을 변화시켜 치유 받은 사역자를 만든다는 것이다.

데이빗 A. 씨맨즈 박사는 이 과정을 가리켜 ‘재생하는 은혜’(recycling grace)라 하였다. 건강한 속사람 치유 사역자는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이해하고 용납하는 온유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이 치유를 경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장 위대한 치유자인 것은 이 모든 것을 경험하신 온유한 치유자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상처와 아픔과 연약함으로 손상된 속사람을 재생시켜 그 경험을 사용하여 또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치유 사역자로 재생산하여 나가는 과정이 속사람 치유 사역의 종착점이다. 그러므로 유능하고 훌륭한 치유 사역자를 많이 배출하는 교회는 더 빨리 성장하는 교회로써 부흥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속사람 치유는 구원받은 백성을 증가시켜 주고, 복음을 증거하는 주역들의 역동성을 강화시켜 주며, 그리고 진정한 사역자를 양성하는 훈련이라는 점에서 교회 성장에 큰 유익과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렇게 한 개인이 속사람 치유를 통해 상한 마음이 치유되고 영적 성숙을 가져올 때, 그가 속한 가정도 치유와 회복을 가져오게 되며, 이것은 결국 그 가정이 소속된 교회의 건강과 성장을 가져오게 되어 교회의 사명을 다하게 되는데, 바로 여기에 속사람 치유 사역이 목회에 꼭 필요한 이유가 있다.

 

4)결 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 병든 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신, 인간관계, 정치, 사회, 교육, 그리고 자연 생태계의 측면에서 볼 때 건강한 삶을 누리기가 불가능하다.

급진전하는 산업사회를 인간의 정신은 따라갈 수가 없는데, 서양에서는 800년 동안에 일어난 변화가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30년 동안에 일어났다. 게다가 최근에는 최첨단 과학의 발달, 물질주의 가치관의 팽배, 사회 경쟁의 심화 등으로 인해 인간은 더욱 소외되고 정신이 황폐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각종 마음의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또한 가정은 가정대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가정 폭력, 이혼율의 급상승 등으로 인한 역기능 가정의 증가로 가정은 이제 상처 난 문제아들을 생산하는 공장처럼 되어 버렸다.

사회와 가정에서 양산된 상처 받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는데, 안타까운 것은, 교회가 이들의 상한 마음을 싸매고 치유해야 함에도, 교회는 치유 기능을 상실한 듯하다. 오히려 교인들 상호간에 혹은 교인과 목회자간에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있으며, 많은 교회들이 이로 인해 중병을 앓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한국 교회가 물량적인 부흥과 외형적인 양적 성장에만 치중한 나머지, 예수님의 3대사역(가르침, 설교, 치유) 중의 하나이기도 한 치유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21세기에 들어선 한국 교회가 새로운 목회적 접근 방법, 특히 속사람 치유 사역을 목회 현장에 도입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상처 난 사람들을 치유하여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들을 회복시킴으로써 영적 성숙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성인 아이를 양산하는 역기능 가정을 회복시킬 수 있으며, 이것은 결국 교회의 성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속사람 치유야 말로 21세기에 들어선 한국 교회가 목회 현장에 도입해야 할 가장 필요한 사역 방법들 중의 하나이다.

 

 

 

 

 

 

 

 

 

 

 

 

 

 

 

 

 

제5장 쓴 뿌리

 

에베소서 3장 16-19에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사람을 어떻게 다루시는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뿌리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계획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뿌리가 박히는 것입니다. 뿌리는 기반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 안에서 뿌리가 박히면 놀라운 기반이 채워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씨앗처럼 우리 안에 박힙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심겨지면 그것이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삶이 사랑 안에 뿌리가 박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어떤 사람은 그 뿌리가 우리 안에 자라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다른 뿌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뿌리들이 우리의 행복하지 못한 가정으로부터 왔습니다. 거절의 뿌리, 쓴 뿌리, 그런 뿌리들이 우리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우리 안에 심겨졌을 때 옛날 뿌리와 새로운 뿌리들이 마치 전쟁이 있는 것처럼 뿌리들이 자라는 것이 너무 힘이 듭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체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까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18,1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알 수 있습니다.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아는 것, 이것은 정말 우리의 삶을 깊이 있게 변화시키는 그러한 경험입니다.

 

로마서 5장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된다고 했지, 우리 정신에 부은바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대해 분명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말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신으로는 생각합니다. 마음으로는 느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바 된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은 “예, 저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느낄 수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알겠는데 그런데 제 가슴으로는 느낄 수는 없습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는 우리가 그렇게 느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3,4절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의 이시요, 우리의 모든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서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을 이번에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아주 독특하게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장 26,27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하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어떠한 동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이 없습니다. 오직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얼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돌아보십시오. 다 얼굴이 틀리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다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습니까?

하나님은 삼위일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세분이 다 하나님이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 영과 혼과 육이 하나가 되게 만드셨습니다. 어떤 동물도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없습니다. 오직 사람만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으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영은 우리의 한 부분인데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영이 우리가 영원토록 영생하는 그 영과 동일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에게 혼이 있습니다.

혼은 우리의 정신과 감정과 의지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혼적인 부분에서도 회복이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혼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에게 몸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몸에 거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를 죄인 되게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죄악 된 속성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이고 그것은 묶여버린 것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길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죄는 용서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의 삶이 변화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악을 이기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의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님이 거하시는 전이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역시 이런 세 가지가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시고 우리도 그렇게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일시적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완전한 몸을 갖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몸입니다. 끝이 없을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나이에 대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아주 완전해 질 것입니다. 흠도 없고, 우는 것도 없고, 죄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천국에서 완전하게 영원히 가질 몸입니다.

 

예수께서 처음으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이 땅에서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목적과 계획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나누셨습니다.

이사야 61장이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이셨습니다. 이것을 위해 내가 여기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61장 1-3에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죄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의의 나무가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 나무에 대해 많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열매가 많고, 계속해서 성장하는 좋은 나무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려고 하신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말씀하신 것이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여기서 어떤 우선권과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서를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소식은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용서받은 것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없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가 용서받은 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너무 먼 것같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죄책감이 있으면 하나님과의 어떤 관계를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사람의 소리만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가 씻김을 받게 되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시간은 결코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시간은 결코 우리의 문제를 다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치유하십니다. 용서함을 받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 죄악을 다 소멸시키시고 씻어버리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용서한 다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것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위로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의 전 인격, 영과 혼과 육의 모두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처음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마지막 부분은 어떤 것입니까? 이사야 53장 3-7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 다 끝냈다. 모든 것이 다 처리되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 일들을 다 해결하신 것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의 죄의 대가를 십자가에서 대신 치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의 대가를 우리가 치룰 필요가 없고 우리의 죄는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아주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여기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예수님께서 고통, 고난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감정적인 고통, 영적인 고통,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아주 많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고 우리의 고통이 우리의 아픔의 짐이 더 가벼워졌고, 그것이 없어질 수 있고, 우리가 주님 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채찍을 맞으신 것이 그냥 몸에 맞은 것, 그것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으로 인해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몸과 영과 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 인격이 나음을 입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굉장히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의 모든 인격이 치유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 각자는 각기 제 길로 가버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계획대로 세우고 우리의 삶을 멋대로 조정해 가면서 주님이 십자가에 가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주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계획이 우리에게 최고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획하신 길이 최선의 길(Best way)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갈 때 거기에만 온전한 성취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뜻 가운데 살아가지 않으면 진정한 충만함이 우리 안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길로 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뿌리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자랄 수 있는 흙이 필요합니다. 흙이 없으면 뿌리는 자랄 수 없습니다. 또 흙에 심겨질 씨가 필요합니다.

 

잠언 18장 14절에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누가 일으키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심령이 상한 것, 그것이 바로 나쁜 뿌리들이 자랄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흙입니다.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긴다고 말씀합니다.

육체적으로 약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몸에 병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그 병으로 고통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목발을 짚고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주 사랑하고, 육체적으로는 아주 좋지 않았지만 그렇지만 그 분은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심령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상한 심령을 갖게 되면 누가 그것을 일으키겠느냐? 심령이 상하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하기 원하시는 멋있는 좋은 일들을 보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한 심령을 갖게 되면 우리 삶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자라기가 힘이 듭니다. 변하기가 힘이 듭니다. 성경 말씀에 우리는 변화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우리는 자라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상적인 단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상한 심령을 갖게 되면 굉장히 힘들게 됩니다. 영광에서 영광이 아니고, 문제에서 문제로, 위기에서 위기로, 낙망에서 낙망으로, 실망에서 실망으로, 그것이 바로 우리가 상한 심령을 갖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결과입니다. 우리의 삶에 희망이 없어져 버립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지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만 우리가 모임에 오지만 언제나 마음에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상한 심령을 치료하기 원하십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1. 혼적인 질병의 기원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후로 인간의 영이 죄로 인하여 죽고, 영의 지배를 받는 혼도 질서를 잃고 질병에 걸리게 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죄에 대하여 책망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는 대신에 다른 이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회피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뿐만 아니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스스로 수치를 극복하려는 자력종교인의 모습도 띠게 된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들로 태어난 가인과 아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부모의 죄로 인한 영향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기뻐하시자, 질투심으로 가인은 하나님께 반발하였고, 나아가서 자신의 혈육인 동생 아벨을 들판으로 불러내어 돌로 쳐서 죽이고 말았고, 그 죄를 책망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는 대신에 뻔뻔스럽게 하나님께 대들었다. 아담과 하와의 마음속에 죄책을 회피하는 쓴 뿌리, 가인의 마음속에 동생에 대한 미움의 쓴 뿌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2. 혼적인 기능의 마비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자, 아담은 아내인 하와와의 관계에, 가인은 동생인 아벨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죄책감과 두려움에 시달리게 되었고, 시기심과 질투심, 미움, 불안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건강하지 못한 혼의 기능으로 인하여 인간은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처를 지니고 살게 되었고, 잠언 17:22절에서 “심령의 근심을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에 말씀하신 것처럼, 육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대신,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계획을 좇아 살게 되었으며, 이렇게 해서 신본주의 대신 인본주의가 지배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마귀의 뜻이나 생각을 좇아 살아가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바벨탑 사건은 인본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게 된 것이다. 인본주의와 사탄주의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성경적인 믿음, 영적인 믿음이 사라지고, 나아가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본주의적 믿음, 이신론, 무신론, 다신론, 범신론, 우상숭배, 사탄숭배 등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3. 혼적인 질병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용어

학자들에 따라서 상한 감정의 치유, 내적치유, 기억의 치유, 인격 장애의 치유, 상한 마음의 치유, 혼의 치유, 쓴뿌리 치유 등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4. 혼적인 질병과 창조질서의 파괴

하나님이 세우신 원래의 질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영-혼-육-환경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영이 죽은 상태에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됨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여 혼이 육을 지배하고 환경을 지배하거나 오히려 환경과 육의 지배를 받는 상황도 생기게 되며, 나아가서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마음속의 우상이나 현실속의 우상들을 만들어내고, 우상들을 숭배하고 심지어 사탄을 숭배하게 되는 것이다.

 

5. 혼적인 질병인 쓴 뿌리

쓴 뿌리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나타난다. 신명기 29:18절에서는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자,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하여 에덴동산에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서 동산을 망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패역하게 되어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숭배 하는 자들을 따르게 되는 모습에 대해서 책망하시는 말씀이다.

히브리서 12:15-17절에서는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게 될 때 마음의 상처와 좋지 못한 기억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여 사람들의 삶속에 쓰고 독이 있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경고의 말씀이다.

이렇게 해서 쓴 뿌리로 인하여 스스로 신앙의 길에서 떨어져 나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되고, 에서와 같이 세속적이고 순간적인 이익에 눈이 멀어 하늘에서 내리는 축복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변절하여 세상과 간음하는 자와 같이 된다는 것이다.

 

6. 타락한 세상과 삶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쓴 뿌리들

사람은 태아기에 모태에 있을 때부터 모태의 영혼육의 상태나 모태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가정의 상황이나 사건이나 언어전달 등에 의해서도 많은 영향을 받고 자라게 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도 태교가 중요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적치유를 할 때 태아가 태중에 있는 상태를 기간별로 점검하고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 존 샌포드와 폴라 샌포드와 같은 내적치유와 축사사역의 전문가들 역시 이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고 있고, 의학적으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성장과정에서도 유아기와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거치면서 받게 된 상처를 통하여 내적인 쓴 뿌리가 형성이 되고 그것이 삶속에서 온갖 악하고 나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체벌의 경험이나 부모나 배우자나 가족이나 친척이나 애인이나 친구나 심지어 애완동물의 죽음에도 상처를 받게 된다. 교통사고나 천재지변이나 성폭행을 비롯한 폭력의 문제, 도박이나 술, 담배, 마약, 따돌림과 같은 일들을 통해서도 거절감정이나 소외, 고독, 중독현상 등의 쓴 뿌리가 생겨나서 삶을 고통스럽게 하며, 정서적으로나 사회생활에 있어서 문제가 생각게 함으로 단계별로 점검하는 가운데 내적인 상처와 쓴 뿌리를 치료받아야 하는 것이다.

쓴 뿌리로 인하여 가정적으로 부모의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비정상적인 가정, 즉 역기능가정에서 자람으로 인하여 내적인 상처와 쓴 뿌리가 배태되거나, 어린시절의 상처가 해결되지 않음으로 육체는 성장하였으나 정서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는 성인아이현상이 나타나, 자신뿐만 아니라 직장이나 모임이나 교회와 같은 공동체 생활을 할 때 장애나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에 당한 성폭행, 성희롱, 강간, 근친상간, 동성애, 애완동물 등의 문제로 인하여 이성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든지, 결혼 이후에 부모로서의 정상적인 역할이나 배우자로서의 정상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생기기고 한다.

또한 강도나 도둑맞음, 직장해고, 부도, 전쟁, 국가의 변란, 교통사고, 안전사고, 강제 이혼, 이사, 이민, 천재지변과 같은 일들을 통하여 스트레스나 상처를 입게 됨으로 해서 쓴 뿌리가 생겨나 삶의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7. 쓴뿌리의 치유방법

Michael Scanlan은 우리의 기억을 표면기억(Surface memories-의식속으로 불러낼 수 있는 기억)과 뿌리기억(root memories-무의식속에 깊이 파묻혀 있는 기억)로 구분하여 치료가 전문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한복음 14:26)라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성령님께 태아 때부터 유아기, 유년기,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삶의 과정 속에서 알게 모르게 혼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쓴 뿌리와 상처들을 생각나게 해 달라고 가르쳐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단계별로 생각나게 하시거나 가르쳐주시거나 떠오르게 하신 상처와 쓴 뿌리나 좋지 못한 기억에 대해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과 상처를 준 사건과 상처를 준 현장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상처에 대해서 토설하는 일을 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를 주어 미움과 쓴 뿌리를 나게 한 이들을 무한히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용서하고 축복하며, 자신에게 있는 모든 쓴 뿌리와 잘못된 기억과 상처들을 예수님의 보혈을 적용하여 깨끗이 씻어내고,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상처와 쓴 뿌리를 끊어내고, 성령의 불로 태워달라고 요청하며, 성령의 기름을 발라 그 상처를 온전히 치유 받도록 한다.

 

 

 

 

 

 

 

 

 

 

 

 

 

 

 

 

제6장 관계

하나님은 참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삶 가운데 승리함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과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히브리서 12:14,15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했습니다.

14절은 기본적으로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십자가를 생각해 봅니다. 십자가는 수직으로 되어있고, 수평으로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하나의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많은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가장 강력한 능력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중에 한 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수직으로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길이 되셔서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십자가는 역시 수평으로 되어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또한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화해할 수 있습니다. 치유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런 종류의 좋은 관계를 할 수 없다면 15절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14절에 말하기를 우리는 정말 조심해야 되고 관계에 있어서 반드시 이대로 해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에 너희는 이러 이러함과 두려워하면서 돌아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프게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은 제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쓴 뿌리가 나서 우리 삶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쓴 뿌리와 거절감의 뿌리는 서로 같이 연결되어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쌍둥이 같이, 여기에 그런 뿌리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도 만약에 우리가 제대로 된 올바른 관계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잘못된 관계 속에 들어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음행하는 것도 할 수 있고, 삶에서 충실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15절을 중심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 마음 안에 뿌리가 있다면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 속에 이것은 심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멋있는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아주 꼭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왔을 때는 너무너무 아름다워 깜짝 놀랐습니다. 굉장히 좋은 그림입니다. 여기 나무 그림이 있습니다. 나무뿌리가 있죠?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있는 뿌리는 볼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뿌리는 땅속에 있습니다. 비가 오고, 태양 빛이 빛치고, 뿌리는 땅속에 있는 영양분을 빨아들이고 계속해서 자라게 됩니다. 역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뿌리가 있으면 거절감의 뿌리, 쓴 뿌리, 어떤 뿌리이든지간에 뿌리들은 영양분을 먹고 자라게 됩니다. 어떤 영양분을 먹게 되죠? 그 뿌리는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먹고 자랍니다. 그것이 바로 뿌리들이 자라는 방법입니다.

 

뿌리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자랍니다.

첫 번째 뿌리는 땅속으로 자라서 더 많은 영양분을 빨아들이려고 밑으로 자랍니다. 땅위 표면으로 자라는 뿌리가 있습니다. 땅 속에 있는 세균들이나 벌레들을 보면서 자랍니다.

만약 우리 안에 뿌리가 있으면 그것이 바로 뿌리가 자라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밑으로, 밑으로 깊게 깊은 곳까지 자랍니다. 어쩌면 마음 가운데 둥그렇게 꽈배기를 틀듯이 자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꽉 눌러 짭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줍니다. 우리를 마음을 점점 단단하고 굳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의 쓴 뿌리로 인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아픔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밖으로 자라는 뿌리가 있습니다. 15절에 말씀하시기를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곤란을 준다는 것입니다. 위로 올라와서 첫 번째 문제는 관계의 문제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 관계에 문제를 줍니다. 만약 우리 안에 올라오는 뿌리가 있다면 정말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하기가 너무나 힘이 듭니다. 모든 사람이 기도하면 우리도 똑같이 함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사생활 가운데서는 이런 뿌리가 안에 있으면 기도하려고 하는데 안 됩니다. 어쩌면 생각만 할지 모릅니다. 어떤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성경읽기입니다. 모임에 오면 쉽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어디에 펴야 할지 압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으려고 하면 이런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덮어버립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아무런 말씀도 못 듣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힘든 일입니다. 하나님과 대화가 단절되는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내 안에 역사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뿌리들이 자기 속사람에서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영역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져 가는 것입니다. 아주 나의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도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도 그렇게 됩니다. 너무 쉽게 관계가 깨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삶 가운데서 그런 쓴 뿌리들이 다 제거되기를 원하십니다. 정말로 많은 뿌리들이 우리 관계들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만약 그 뿌리들을 땅속에 놔두면 언젠가는 이 뿌리가 위로 올라와서 자라서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 가운데 뿌리가 있다면 어느 날인가 그 뿌리가 우리 삶 밖으로 나올 것입니다.

뿌리가 나오는 통로들 - 부정적인 말들, 비판하는 말들, 수군수군 대고 남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들, 바로 이것들이 뿌리가 나오는 통로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말들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손상을 줍니다.

만약 한 사람에게 쓴 뿌리가 있어서 그것이 입을 통해서 네 사람에게 나간다면 네 사람 다 밑으로 침체시켜 버립니다. 한 사람은 거절감에서 나온 뿌리로 말하고 다른 사람들을 죄의 그물에 걸리게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입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뿌리를 제거할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땅 속에서 뿌리를 뽑기를 원한다면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한 가지 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뿌리를 뽑기를 원하면서 위의 것들의 가지를 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위를 잘라서 나무를 손상 입히게 됩니다. 정말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뿌리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죠? 다시 자랍니다. 그렇게 위를 아무리 치는 것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해야 할 일은 두 가지 일입니다.

첫 번째는 힘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온유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 뿌리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 조심스럽게 그 나무를 뽑아 올릴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뿌리가 있는 밑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뿌리가 잘 빠져나올 수 있도록 흙을 파헤칩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어떤 뿌리가 잘라지지 않도록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뿌리가 부러지게 만든다면 그 속에 남아서 또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아주 부드럽게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먼저 그 뿌리를 흔들고 흙을 파헤쳐서 뿌리가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뿌리를 느슨하게 한 다음 모든 뿌리를 위로 끌어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흙 들은 흔들어서 밑으로 떨어지게 하고, 뿌리는 다른 곳에 버립니다. 다시는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 있는 뿌리도 똑같이 합니다. 만약 우리 안에 뿌리가 있으면, 성령은 능력 있고 강하지만 또한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뿌리가 있는 깊은 곳으로 들어가시도록 초대합니다. 그 어린 아이가 있을 것 같은 우리 마음 깊은 곳으로 성령님을 초대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그 어린 아이를 끄집어 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 어린 아이는 나가버려야 합니다.

 

우리 자신부터 그 뿌리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많은 종류의 뿌리가 있었습니다. 어떤 것들은 이것이 무슨 뿌리인지조차 모르는 것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뿌리를 제거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호세아 10:12에 보면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자 여기에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묵은 땅을 기경하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땅을 공개해서 그 땅을 기경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그 땅을 공개적으로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공개해야 합니다. 농부가 가까이에 있는 땅을 발견하면 먼저 농부가 땅을 파헤칩니다. 아주 보기에 좋습니다. 그런데 산 밑에 있는 땅은 한 번도 갈아 본적이 없는 땅이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좋은 것만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뭔가를 할 수 있고, 보기 좋게 꾸밀 수도 있고, 사람들이 그런 것만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묵은 땅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공개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묵은 땅 거기에 뿌리가 심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묵은 땅, 숨겨져 있는 땅을 하나님 앞에 공개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로써 열어놓고, 그래서 그 뿌리들을 다 공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 묵은 땅 속으로 들어가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뿌리들을 다 제거해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첫 번째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보통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정말 안에서 무엇인가가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눈에서 눈물이 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은 가끔가다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정말 그것이 뿌리가 나오면서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삶 가운데 아픔이 많기 때문입니다. 너무 너무 아프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고통에 대해서 표현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있는 아픔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아마도 기도할 때 그런 아픔을 느낄 것입니다. 만약 그런 아픔을 느끼시면 스스로 그 아픔을 삼키고 자꾸 밑으로 누르려고 하지 마세요. ‘나는 괜찮아’하면서 삼키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그것을 꺼내도록 허락하십니다. 성령께서 그것을 전부다 뽑아가 버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들은 영원토록 가버릴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몇 번밖에 못 보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사람은 무엇인가가 입에서 올라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이 쓴 뿌리이든, 거절감이든지, 교만이든지, 어린아이가 안에 있는 것이든지, 모든 것이 다 나오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먼저 기도하여야 합니다. 보통 손을 가슴에 얹고 기도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만약 여러분 안에 뿌리가 없다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 기도해 주십시오. 만약 뿌리가 있다면 기도하시면서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 성령님께서 그 뿌리들이 아주 쉽게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바로 우리 삶 안에서 뽑혀 나올 수 있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뿌리가 나온다는 것을 확실히 믿게 됩니다.

굉장히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치유함을 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래서 믿기는 이 뿌리가 쉽게 나오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이 아픔을 느끼시면 두려워하지 마시고, 그 아픔이 나오도록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우리가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쏟아 부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계십시오. 이것은 너무 깊은 치유입니다. 뿌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삶을 치유해 주고 계십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뿌리가 나왔다는 것을 느낀다면 이제 하나님 앞에 찬양하고 감사하기 시작하십시오. 만약 여러분 중에 지금도 뿌리가 계속 나오고 있다고 느끼시는 분은 계속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치유하시고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정말 어떤 갈등과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너무 너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고통과 아픔들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쓴 뿌리들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거절감 같은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계속해서 상처받아왔던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쓴 뿌리들이 우리 삶 가운데 떠나간 후에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겠습니까?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성경말씀은 무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2:1-5에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 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볼 때 예수님께서 어떤 식으로 말씀을 하시는가를 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만약에 첫째, 둘째라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순서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여기서 아주 분명히 첫째, 둘째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통 2절 말씀은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에 보면 2절은 1절 말씀 다음에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1절 말씀에 이야기하기를 모든 나쁜 태도를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이런 나쁜 열매를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을지라도 자랄 수가 없습니다. 먼저는 나쁜 열매가 사라져버려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여러분 안에 많이 갖고 있는 것, 그것은 정말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에 대해 많이 배우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많은 성경지식이 결코 우리를 성숙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들이 삶은 성숙하지 못합니다. 굉장히 안 좋은 일을 하고 쉽게 화를 내고 사람들과 죄악 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많은 성경지식이 우리를 성숙하게 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반응할 때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게 할 때 그렇게 됩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회복시키고 그렇게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를 성숙하게 합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항상 1절이 2절 앞에 옵니다. 그 다음 3절에 주의 인자하심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주의 깊게 봅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세가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에게 버림받은 바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의해 택하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는 보배로운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너희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버림받았죠?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보배로운 분이십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버림받았죠? 거절한 사람들은 우리가 거절감을 받은 것조차 모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절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보배롭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사람에게 의해 버림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듯이 여러분도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배롭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보배로운 것을 믿으세요? 아마도 평생 동안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보배로운 분이라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여러분은 보배롭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하기가 힘든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정말로 보배롭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받았고 보배롭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를 보겠습니다. 2장 10절에 “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로 영어 번역으로는 한국말로, 중국말로 다른 많은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는데 좀 잘못 번역되었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어에 보면 이것이 진짜 의미입니다.

‘Poiema'(포이에마) 이것이 어원이 되어 영어에서 poem 시(詩)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시'(詩)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이 이 의미를 제대로 번역할 수 없었습니다. 헬라 원어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詩)입니다.

여러분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시'(詩)입니다. 아주 여러분만의 독특한 ‘시'(詩)입니다. 아주 특별한 ‘시'(詩)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시를 써 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행복할 때 시를 쓰실 것입니다. 시는 여러분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여러분의 안에 있는 것들을 자기 자신이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시'(詩)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시를 통해서 표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를 통해 표현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렇게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시'(詩)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Poiema'라는 것 중에는 창조된, 걸 작품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갤러리에 한 번 가보십시오. 비싼 미술품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걸 작품이고 그것이 포이에마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창조하신 걸 작품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걸 작품이다."

처음부터 이야기한 것을 다시 말해 봅시다. “나는 하나님께 선택받았다." “나는 하나님께 보배로운 자다" “나는 하나님의 시이다." “나는 하나님의 걸 작품이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 선택받았고 여러분은 보배롭고 하나님의 시이고 하나님의 걸 작품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다른 말을 많이 듣죠? 우리는 부정적이고 비난하는 말을 들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친절이 결핍된 말을 들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이것이 진리입니다.

만약 우리가 승리 가운데 살기를 원하신다면 첫 번째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믿으세요. 한 가지 더, 제발 여러분에게 가까운 특별한 친구에게로 가지 마십시오. 친구에게 가서 이야기 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말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로 가서 그분들을 축복해 주십시오.

 

 

 

 

 

 

 

 

 

 

 

 

 

 

 

 

 

 

 

제7장 쓴 뿌리와 거절감으로부터 승리하는 삶의 방법 (용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가 받을 것이다”라는 말이 성경에 나와 있는데 그것이 단지 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해 다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나누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주십니다. 에베소서 1:7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중의 하나가 ‘용서함’이었습니다. 모든 분들이 알기를 원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하나의 기반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용서함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어떤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용서함이라는 것은 우리가 남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에베소서 4:30,32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너희들이 서로 용서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4:13에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했습니다. 피차 서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용서하는 것이 뿌리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는 굉장히 큰 열쇠가 됩니다.

여러분에게 용서에 대해 잘못된 개념 두 가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감정에 따라 해야 된다는 개념입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용서는 사실 그것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다릅니다. 얼굴도 다르고 성격도 다릅니다. 여러분 중에 상처를 입거나 누가 나를 대적하거나 하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더 깊은 상처를 냅니다. 그리고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나서 다시 기도하고 자유롭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마치 영웅 같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냥 삼켜버립니다. ‘나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어, 나는 괜찮아, 문제없어’ 그리고 속으로 다 삼켜버리고 ‘나는 영웅이다’라고 느낍니다. 이 사람들은 문제를 이렇게 다루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 나는 용서할 필요가 없어’라고 말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적절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 것은 그냥 속으로 삼켜버린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도움을 주지는 못합니다.

만약 내가 그런 영웅같이 느낀다면 몇 년 후에는 그 문제들이 다시 더 발전이 될 것입니다. 삼켜버린 문제들이 이 속에서 쌓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안에 있는 것이 점점 차 올라오기 시작해서 아주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굉장히 성질이 급해지고, 그 사람의 첫 번째 문제로써 야기됩니다. 두 번째 문제는 그 마음 안에 있는 감정적인 문제들이 육체에 영향을 주기 시작합니다. 소화기관, 근육, 뼈 같은 곳에도 병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우리 감정이 우리 육체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생각하기를 육체의 질병이 우리의 감정에 영향을 준다고 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만약 우리가 영웅이라면 우리 삶 가운데 직면할 수 있는 위험스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굉장히 쉽게 화를 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 안에 소화기관에 문제가 있거나 근육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 감정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감정의 정도가 다릅니다. 용서는 그 일어난 일에 바탕을 두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 나는 용서해야 되겠다.’ 그 다음 잘못된 개념은, 어떤 사람은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용서할 수 없다 이것을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다른 것입니다. 만약 내가 말하기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묶어버리는 맹세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맹세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이 맹세를 깨뜨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용서하기를 거절한다면 ‘아니 나는 절대로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어’ 이렇게 된다면 그것은 굉장히 심각해집니다. 그것은 우리 감정을 감옥 속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용서를 아주 많이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에게 아주 조금 빚진 사람을 찾아가서 그 사람이 목덜미를 잡았습니다. 28절에 보면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동관이 엎드려서 간구하고 간구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동관이 빚진 돈은 갚기 쉬운 금액이었습니다. 30절에 보면 그 사람이 말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고 라고 했는데 영어 성경에 보면 용서하기를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번역에 보면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합니다.

33절-35절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감옥으로 가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짜 의미는 우리가 감정적으로 묶인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용서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가 평강을 잃어버리고 기쁨을 잃어버리고 감정적으로 불안정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맹세를 하셨다면, ‘나는 용서할 수 없어’라고 하는 감정과는 다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나는 그것 때문에 너무 상처받고 너무 아파서 정말 용서할 수 없어’라고 느낍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감정을 이해하십니다. 여러분이 ‘나는 용서할 수 없어’라고 할 때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는 용서하고 싶은 우리 감정이 나는 할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만약 우리가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께서 영혼을 주시고, 영혼은 지  정  의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의 의지가 우리의 감정보다 더 강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만약 감정이 의지보다 더 강하다면 우리는 벌써 병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을 때는 의지가 감정보다 더 강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실입니다.

우리의 감정이 우리 속 안에 있는 느낌이 ‘나는 용서할 수 없어’라고 이야기할지라도 우리는 주님 앞에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에베소서에서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함을 벌써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함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그 진실이 있습니다. 바로 그 용서함으로 우리는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감정은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나는 용서하겠다.’ 그렇게 결정하면, 그리고 그 결정한 대로 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감정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용서는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용서할 때 첫 번째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통해 이 일들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하면 먼저 ‘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맹세한 것이 있다면 그것부터 하나님 앞에 깨뜨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구하기를 “주님, 그 모든 맹세를 다 깨끗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그런 잘못된 맹세를 할 때 우리 안에 있는 판단과 쓴 뿌리로부터 그런 맹세가 나옵니다.

두 번째,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누구를 용서하는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간에, 그 사람이 살았든 죽었든지 간에, 그 사람이 한 사람이든지, 그 사람이 남자이든, 그것이 다른 나라 종족이든지, 그것이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 앞에 누구를 용서한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 아버지에게 우리가 왜 그들을 용서하는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내가 이 사람을 용서하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한 것에 대해 용서합니다.’라고 왜 용서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셔야 합니다.

네 번째, 그 용서를 구하는 기도에서 이 사람을 향해서 혹시 나쁜 태도나 잘못된 태도를 취한 것이 있다면 그런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꼭 기도해야 합니다.

1. 맹세를 깨트리라.

2. 누구를 용서하는지 말하라.

3. 왜 용서해야 하는지 말하라.

4. ‘나를 용서하십시오.’라고 기도하라.

이것이 바로 용서함에 대해 기도할 때 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18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15절에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형제들에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형제들에게 이야기했다는 의미는 바로 제자들에게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가까운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함께 자라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보통 우리들과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관계가 깨어졌다면 우리는 화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놀라운 능력이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화해할 수 있습니까? 비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가서 비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황을 나쁘게 할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그 사람에게 가서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너에게 대해 미운 감정이 있었던 것에 대해 사과할게요!”라고 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올 것을 기다리지 마세요.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가세요. 여러분이 먼저 그 사람에게 가세요. 남편과 아내이든지, 형제와 자매이든지, 기독교 공동체 안이든지, 하나님의 가족 안에 있든지 화해하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용서에 대해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21,22절에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곱 번 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진짜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했으니까 됐어 끝났어!” 이런 것이 아닙니다. 나는 용서했는데 다시 생각하면 물론 생각이 기억이 납니다. 영어 속담에 “용서하고 잊어버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잊어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가다가 생각이 납니다. 어떻게 우리가 용서하고 잊어버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절대로 용서하고 잊어버리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잊어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삶 가운데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습니까? 가끔씩 그 기억들이 살아납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다시 보면, 만약 그 사람과 같이 사는 상황이라면, 아니면 꿈을 꾼다면, 정말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끔가다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 사실 자체가 우리가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용서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이 나면 다시 용서하십시오. “나는 용서했는데 지금도 용서하고 미래에도 계속 용서할 것이다.” 이게 바로 진짜 용서입니다.

절대로 성경에서 용서하고 잊어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인데 “용서하고 또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진짜 용서는 그런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를 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만약 여러분 안에 분명히 용서해야 될 사람이 있는데 기억이 안 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보여주시고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있을 때 용서함도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제8장 내적 치유와 용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해코지 한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내 힘으로 보복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원수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 실제로는 나를 고문하고 학대하는 것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다. 어떤 의사는,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환자들 중에서 용서만 제대로 한다면 약 50% 정도는 금방이라도 퇴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에게 해코지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폐를 끼치기보다 실제로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용서의 최대의 수혜자는 용서하는 사람 자신이다. 남을 용서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가슴에 대못을 박는 사람이다.

1. 용서와 회개가 내적 치유의 양대 축이다

용서는 회개와 함께 내적 치유의 양대 축이다. 용서 없이는 회개가 있을 수 없고 용서와 회개가 없는 내적 치유는 불가능하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 11:25).

비록 신자이지만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죄를 지었으면 회개를 해야 한다. 회개란 쉽게 말하면,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은 죄는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나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은 내가 회개할 때 그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우리가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는 조건으로 용서해 주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옥가야 마땅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우리는 당연히 우리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2. 무자비한 종의 비유

우리의 죄 용서에 관한 하나님의 은혜와 그런 큰 은혜를 입고도 자기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이 처분하시는가에 대해서는 마태복음18장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 18:21-35)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죄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옥졸들에게 붙여져서 고통을 받는다(마 18:34-35).

“옥졸들에게 붙이셨다”는 말은 옥졸들의 처분에 맡겼다는 말이다. 인권이 최고로 발달한 미국이나 한국의 교도소에서도 때로 간수들은 죄수를 무자비하게 다룬다. 하물며 인권 사상이 거의 전무한 당시의 옥졸들이 무자비한 종을 어떻게 가혹하게 다루었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핵심적인 의미는 무엇이냐? 그렇게 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도 자기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크나 큰 고통을 당한다는 말이다.

일만 달란트, 6,000만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나 되는 엄청난 빚을 공짜로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윽박지르며 용서하지 않는 이 종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고슴도치같이 서로가 서로를 찌르는 죄인이다. 알게 찌르고 모르게 찌른다. 문제는 내가 남을 찌른 것은 금방 잊어버리지만 남이 나를 찌른 것은 쉽게 잊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앙심을 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복한다.

많은 사람들은 누가 나를 괴롭히고 해코지를 하면 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대방을 미워하면 할수록 내 자신을 괴롭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증오심이 지나치면 혈압이 오르고 맥박이 뛴다. 오래 되면 화병이 나서 몸져눕는다. 신체적인 병의 70%는 마음에서 오는 병이며 분노에서 오는 병들이 대부분이다. 어느 사람은 ‘세월이 약이다. 잊어버리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간단한 것은 쉽게 잊어버릴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심령 깊숙이 박혀 있는 증오심은 세월이 간다고 잊혀 지지 않는다.

잊혀 진 것 같지만 깊숙이 박혀 있다가 짜증나는 일이나 언짢은 일이 생기면 온갖 형태의 추한 몰골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상대방의 사소한 잘못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극도의 자기보호 본능 때문에 정상적인 부부 관계나 인간관계를 가지는 것이 어려울 때가 많다. 이것들이 바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한 무자비한 종이 옥졸들에게 붙여져서 당하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힘입은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나를 해코지한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지은 죗값은 아무리 크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100 데나리온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수님을 대신 희생시키신 값은 6,000만 데나리온이다.

여러분은 어떤 죄 값을 갚겠는가? 100데나리온인가, 6,000만 데나리온인가? 성경은 원수를 용서하고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축복까지 해 주라고 말한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8).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병은 이 세상의 어떤 약(藥)으로도 치료할 수 없다. 미워할수록 내 가슴에 굵은 대 못을 망치로 쾅, 쾅 박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것을 치유하는 약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하는 일이다.

나를 저주하고 나의 신세를 망친 사람을 축복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내 심령 깊숙이 박혀 있는 증오의 가시를 뽑아내는 유일한 약이다. 나의 원수를 축복할 때 나를 괴롭히던 증오의 가시가 뽑히고 내 심령에 평강과 안식이 임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3. 용서하지 않았을 때 받는 불이익들

형제를 제대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불이익이 있을까? 그 반대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마 6:14-15; 막 11:25; 롬 12:19-21; 요 20:23).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5).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힌다. 내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있으면 그 화살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날아간다.

➭영, 혼, 육의 고통을 당한다(롬 2:9-10; 8:6; 사 48:22; 57:21).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롬 2:9-1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없다 하셨느니라.”(사 48:22)

➭하나님이 예물을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마 5:23-25; 호 6:6; 암 5:21; 사1:11-18).

예수님은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고 말씀하신다(마 5:23-25).

➭마귀의 궤계에 놀아난다.

용서 않고 금방 분을 삭이지 않으면 마귀의 궤계에 놀아난다.(고후 2:10- 11; 엡 4:26-27).

죄 지은 형제를 제 때―해가 지도록 즉 하루가 지나기 전―에 용서하지 않으면 마귀에게 공격할 팔 발판(foothold)을 주어,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통해, 분노. 증오, 배신감, 죽음과 자살의 영이 역사 하여 이후에 용서하는 것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4. 남을 잘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

이런 불이익들의 많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용서하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나는 잘 했고 남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 폭행이나 어른의 폭행 등과 같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받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도 사적인 보복은 절대 금물이다.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이 고난을 당하셨지만 스스로 원수를 갚지 않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셨다(벧전 2:22-23).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일방적으로 당했다기보다는, 상대방의 허물은 보지만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기 전에 나의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는 자세가 필요하다.

➭교만한 마음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

감히 내가 누구라고 나를 이렇게 대해’라면서 복수의 칼을 가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죄 지은 형제를 불쌍히 여겨서 용서해야 한다(엡 4:32).

➭용서해준 것 같은데 기도 중 용서해 주지 않은 것같이 생각된다.

사역을 할 때 이런 간증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표면적으로는 용서한 것 같지만 중심으로 용서하지 않았을 경우에 성령이 다시 중심으로 용서하게 하시는 경우이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마 18:35).

내가 죄 지은 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했나를 알려면, 그 사람이 잘되었거나 잘못되었다는 소문이 들릴 때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잘 되었을 때 배가 아프고 잘못 되었을 때 고소한 마음이 생기면 중심으로 용서했다고 할 수 없다.

➭보상 심리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 보상 심리가 있다. ‘내 원수의 빚은 공짜로 탕감해 주면 내가 받을 빚은 누가 갚아주는가? 내 원수를 누가 갚아 줄 것인가?’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이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

➭가해자가 먼저 사죄하지 않기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먼저 용서하셨고(롬 5:8), 간음한 여인이 회개하기 전에 먼저 용서하셨다(요 8장). 특히 고의적으로 해를 가한 가해자일 경우 가해자 먼저 용서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때 주님의 사랑으로 먼저 용서하는 자가 승리하는 사람이며 가해자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다.

5. 누구를 용서할 것인가?

우리는 용서라고 하면 얼른 나에게 죄 지은 사람만을 용서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용서의 대상은 하나님, 나에게 죄 지은 형제 및 자기 자신이다.

➭하나님

충격적인 사건이나 뜻밖의 재앙을 당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why me?)라면서 무엇보다 먼저 이런 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신 하나님을 원망한다. 욥이 재앙을 당했을 때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는 악담을 했다.

➭다른 사람들

나에게 고통과 상처를 준 모든 사람들을 말한다.

➭본인 자신

자신이 죄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연민의 정과 함께 피해자가 된 그 사실을 증오하여 자신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완벽주의, 율법주의, 부당한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이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의지하여 자신마저 용서하고 축복할 필요가 있다.

6. 용서하는 방법

용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신자는 누구나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할 권세가 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3).

그러므로 용서는 직설적이 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 아버지 저는_____죄를 지은 _____를 용서합니다.”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_____를 용서하기를 원합니다.”“하나님 제가___를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가 이 땅에서 용서할 때 매인 것이 풀린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가능하면 가해자 본인에게 직접 용서를 해주면 좋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가해자의 사망, 원거리에 거주, 행방불명 등―으로 가해자를 직접 용서하기 힘들거나 가해자가 아직 용서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 경우에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유의할 사실은 마음으로 지은 죄는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할 것이며, 성적인 죄를 배우자에게 미주알고주알 자세히 고백하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용서할 때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아 내적 치유가 주는 심령의 평강과 안식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전 2:24)

 

 

 

 

 

 

 

 

 

제9장 거절감과 쓴 뿌리로부터 자유

첫 번째는 영적 전쟁입니다. 영적 전쟁은 항상 기도하면서 사단을 대적하면서 하는 그런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항상 그렇게 한다면 피곤하고 지쳐버릴 것입니다.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영적 전쟁은 잘못된 영을 하나님의 영으로 대체시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7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들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권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위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위를 사용해야 합니다. 영적 전쟁은 우리의 우선권을 제 위치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

올바른 우선권은 첫 번째,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두 번째는 가족과의 관계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멤버들과의 관계입니다. 네 번째는 사역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우선권의 순서입니다. 좋은 사역은 올바른 관계 속에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이 우선권이 바뀌어 버리면 우리는 관계 속에서 상처를 입고 입히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사역을 우리의 관계보다 더 우선권으로 둔다면 우리는 정말 관계 속에서 많은 상처를 주게 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우선으로 둔다면 우리가 또한 상처를 입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선권을 정해 두셨습니다. 첫 번째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그 다음 가족과의 관계입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양식입니다. 만약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면 그 다른 관계는 다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남편과 아내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그 밑에 있는 관계들은 제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으면 우리가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없고 효과적으로 주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참으로 단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들을 따른다면 우리는 정말 축복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우선권을 제 위치에 둔다면 우리는 항상 승리를 맛볼 것입니다.

또한 영적 전쟁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의 사랑이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게 하고 그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들어가게 해야 합니다. 사랑은 굉장히 능력이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다 내어 쫓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 가운데 가득 차게 하시기 바랍니다. 가족들 안에 가득 차게 하고, 교회 안에 가득 차게 하고 그럴 때 이 죽음과 두려움의 영은 깨어져 버릴 것입니다.

또한 영적 전쟁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찬양 노래들이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줍니다. 또한 찬양과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그 안에 있는 나쁜 영의 세력들을 묶어 버립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야기했던 우리의 정신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능동적인 생각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수동적인 생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만약 우리가 수동적인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감정에 항상 순종하고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수동적인 생각을 가지면 우리가 이것을 하기를 원하지만 결국 그것을 하지 못합니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수동적인 생각을 하고 살아갔을지 모릅니다.

한국어 성경이 마음과 정신을 제대로 구별해서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성경 원어에서는 우리의 정신, 생각과 마음에 대해 뚜렷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너희 정신을 능동적으로 사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을 받으면 우리의 모든 생활이 변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우리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정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능동적으로 사용하실 수 있게끔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정신을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승리함 가운데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여러분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생각 안에 여러 가지 압력과 부담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스트레스를 이기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어쩌면 지금 스트레스 가운데 살아가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데 그것을 또 터뜨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 머리가 폭발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제발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기도하세요. 우리가 어떻게 정신을 다루어갈 것인가 정말 중요합니다. 영적 전쟁은 우리의 생각을 컨트롤하는 것입니다.

 

 

 

 

 

 

 

 

 

 

 

 

 

 

 

 

 

 

 

 

제10장 상처란 무엇인가?

세상에는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더욱 많다. 그 훌륭한 다윗은 왜 어느 날 갑자기 밧세바와 간음하는 죄를 범했을까? 창녀와의 섹스 스캔들 때문에 추락한 미국의 유명한 텔레비전 부흥설교가 이고 학교도 세웠던 지미 스와거트(Jimmy Swaggart)나 동성연애와 간통과 성폭행의 의혹 속에서 공금횡령으로 8년간의 감옥살이 하였던 짐 베이커(Jim Bakker)는 처음부터 문제가 많은 사기꾼이었을까?

 

빈야드(Vineyard)의 다음 세대를 맡았던 목사가, 그 훌륭한 찬양을 많이 작곡한 그가 알코올 중독자였고, 포르노 무비 중독자였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가? 더구나 은혜롭게 설교하고 집회를 인도한 날 밤이면 더욱 심하게 술과 포르노에 빠져들었다는 것에 대하여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는가?

 

교회에서 기도 많이 한다는 권사님 중에서 온통 사람들과 부딪히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며, 평생을 성공적으로 목회한 목사님이 말년에 소유와 집착 때문에 추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은 무슨 연유인가? 이런 이야기를 열거하려면 수도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병이 있다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뜨리고 있는, 그리고 어렴풋이 그것이 상처라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일 어떤 병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정작 그 병의 원인도 그리고 치료법도, 심지어 병명조차 정확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괴질’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상처는 일종의 괴질이었다.

병이라는 것의 사전적 정의가 “생물체의 전신 혹은 일부분에 생활 기능의 장애로 변화가 생겨 고통을 느끼는 상태”라고 할 때, 상처도 분명히 병의 범주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장애’ 와 ‘고통’이 상처의 주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상처의 치유는 목회와 복음 사역의 주요 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치유를 위해서는 상처가 무엇인지? 그 원인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발전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1. 내면이 중요합니다.

 

내적 치유 사역을 하면서 보니 상처의 치유를 위해 해야 되는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바로 우리의 내면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임을 깨닫게 됐다.

왜냐하면, 첫째로 사람의 삶의 질은 외적 환경보다는 내면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잠언 4장 23절에 보면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는 말씀이 나오는데도 사람들, 심지어 신앙인들조차 외적인 환경을 만들면 삶이 행복해 지는 것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의 질은 외적인 부분보다는 내적인 부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면이지 결코 외적 환경이 아니다.

 

둘째로 내적인 건강이야말로 진정한 건강이기 때문이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옵시며”(엡 3:14-16).

 

세기의 결혼이라고 했던 영국의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비의 결혼식 때 주어졌던 말씀이 바로 이 에베소서 말씀의 바로 뒤 이은 부분인 17절부터였다고 한다.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아…”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부분 말씀보다는 그 앞에 있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 겉은 멀쩡했으나 내면이 건강하지 못했기에 그들은 참 비참한 결론을 내고 만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외적 건강과 안녕에는 몹시 예민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정작 내면적 건강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물론 몸이 아프면 참 많이 고통스럽고, 삶의 모든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이 사실이다(간혹 아픈 가운데에서도 큰 기쁨을 누리는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다 보니까 하나의 착각이 자리 잡게 된다. 그것은 몸이 건강하기만 하면 그 기쁨과 행복이 삶 가운데 오는 것으로...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배고플 때 밥 한 그릇은 우리를 매우 행복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또 한 그릇을 더 먹었을 때 행복이 두 배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거기에다가 또 한 그릇을 더 먹으면 이제는 행복이 아니라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몸의 건강이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하는 데 차지하는 비중은 부분적이다. 훨씬 많은 부분을 내면의 건강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부분은 안다고 하는데도, 실제로 그들이 행동하는 것을 보면,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몸은 조금만 아파도 그것을 고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면서도, 마음의 건강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방치하기 때문이다. 내면에 관심을 기울여야한다. 왜냐하면 중요한 건강은 내면적 건강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에 관심이 많으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4장 13절을 가훈처럼 액자를 해서 걸어 놓은 집들이 많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그렇게 해 놓고 바라보는 그 말씀의 본뜻은 그것이 아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이 말씀은 사실 그 앞에 있는 12절 말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라는 말씀과 함께 봐야 그 뜻이 정확해지는 말씀이다. 즉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은 상황을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능력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모든 상황을 다 바꾸실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해서 우리를 인도하시기보다는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써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그 방식을 택하신다. 성경 도처에 나오는 증거들을 읽어보면 이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주께서 네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5)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과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3서 2절)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인도하시는 방법이 주로 내면을 통해서이고, 또 동시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의 중점이 마음을 고치는데 있었으므로(“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 사 61:1 ), 모든 목회적이고 영적인 관심과 적용이 우리의 내면으로 향해야 함은 당연하다.

 

2. 상처란 무엇인가?

 

먼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내면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관심을 내면으로 돌리고 나면, 그 다음에 풀어야 할 이야기는 바로 그 내면을 건강하지 못하게 망가뜨리고 뒤틀리게 한 ‘상처’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이다. ‘알아야 치유를 하든지 할 것 아닌가?’라는 아주 상투적인 이유에서라도…

 

첫째, 상처란 상처 난 감정이다

‘상처’라는 말을 정확히 제대로 말하면, 그것은 ‘상처 난 감정’이라는 말이다. 사람의 내면을 지, 정, 의 세 부분으로 본다면, 그 가운데서 상처를 받는 부분은 ‘감정’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 정, 의 가운데 가장 쉽게 다칠 수 있고, 또 가장 예민한 부분이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살아가면서 감정에 상처를 안 받으며 살 수 있는 인생이 어디 있는가? 대부분의 인생이라는 것이 상처를 다 주고 받으며 살되, 그것을 지성과 의지를 사용해서 적절하게 해소하고 아물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적절하게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문제이다. 여기서 적절하게 해결이 안 되는 (혹은 안 된) 상처란 그 상처를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받아서 그것을 부적절하게 처리한 것이든지, 아니면 상처 위에 세워진 가치관이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받아서 내면이 그렇게 상처 가운데 자리를 잡은 경우, 그리고 현실적으로 아직도 피가 흐르는 상처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기에 처리가 안 되고 있는 경우 이 세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것은 주로 어릴 때 받은 상처를 말하는 것이다. 나 자신처럼 태아 때에 받은 상처까지 포함해서 어떤 버림받은 사건이나 관계, 환경, 언어를 통하여 상처를 받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기에 주로 망각이나 부정, 투사 등의 방어로 부적절하게 덮게 되고 그것이 나중에 부적절한 상황에서 부적절하게 느껴지는 것, 그래서 고통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상처의 가장 일반적인 전형이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특별하게 불우한 환경이나 부당한 상황에 있지 않았는데도 내면이 심히 허약한 사람들을 많이 보는 데, 그 이유는 그들의 경우 대부분 어떤 사건이나 환경을 통해서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니라 상처가 많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그의 영향력으로 상처가 자리 잡은 경우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을 줄 때 정말 순도 100%의 사랑만을 줄 수 없다. 거기에는 그의 상한 감정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전달되는 것이고, 그것을 자녀는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받아먹게 되기에 상한 감정이라는 내면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잉보호에 의한 상처 이야기가 이것의 가장 두드러진 예이고, 유전적인 분노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지나치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하고, 심한 두려움을 가진 내면도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과거가 지금 현실에 부적절한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또 한 가지, 현실적으로 상처를 너무 심하게 받고 있기에 처리가 안 되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엄청난 배신을 경험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는 누구든지 처리되지 않은 상처 가운데서 고통 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지난날의 부적절하게 처리된 상한 감정 위에 이것이 더해지면 그 고통은 더 엄청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상처란 내면의 평강을 빼앗는다.

상처는 감정에 받는 것이기에 상처받은 사람의 경우 내면에 평강이 없다. 상처는 감정의 문 가운데 음부의 문(The Gates of Hades, 마 16:18)을 열어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면은 순식간에 지옥이 된다. 이사야 11장 6절부터 9절까지에 보면 소위 낙원의 회복(Paradise Regaining)이라고 하는 회복된 낙원의 모습이 나오는데, 거기에 나오는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라는 대단히 황당하고 이상한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그 마지막에 이 현상을 정확히 설명하기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평강’(Shalom)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일어난다면, 어느 사회, 국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마음에서 일어날 것이다(천국은 원래 한 개인의 삶의 변화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사회 제도나 조직의 변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니까…).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주의 말씀이 덮이면서, 그 미움과 적대감, 자기 스스로를 죽이는 생각들, 느낌들, 바르지 않은 자기 평가, 이런 모든 것이 주의 말씀으로 바로잡아지면서,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그런 모습이 내면에 일어나게 되고 바로 그것이 상처가 치유된 모습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처가 우리에게 있음으로 우리 가운데 주는 가장 큰 고통, 피해는 바로 우리의 내면에서 이 평강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여기서 ‘평강’ 이라는 말을 ‘아무 느낌이 없음’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곤란하다. 오히려 상처가 많은 경우 망각이나 억압이라는 방어를 사용해서 감정적으로 무감각해져서 고통이나 아픔을 느낄 수 없는 내면이 되는 경우가 있는 데, 이것을 평강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셋째, 상처는 관계의 장애를 가져온다.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있는 가장 심각한 현실적 문제는 관계의 장애이다. 어떤 여자 집사님이 와서 하는 말이 자기는 결혼하기 전에는 자기에게 상처가 전혀 없었는데, 결혼하고는 상처가 많아 졌다고 말하면서 이 모든 책임을 결혼과 남편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사실은 상한 감정이 잠복되어 있었던 것인데, 결혼 전에는 그렇게까지 깊은 관계가 맺어진 일이 없었기 때문에 몰랐다가 도망갈 수도 없고 적당히 거리를 둘 수도 없는 본격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그 상처가 위력을 발휘한 것이 된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두드러진 특징은 ‘이기적’인 것과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겉으로는 아닌 것 같아도…, 그러므로 상처가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상처를 가지고 계속 살게 되면 결국은 ‘생명력’(Vitality)을 잃게 된다.

‘생명력’은 우리의 삶의 질을 재는 척도인데, 상처는 바로 이 생명력을 감소시킨다. 생명력은 다른 말로 하면 건강한 삶의 의욕이고, 이것은 적절한 자존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때 내면에 느끼는 느낌이 평강(Shalom)인데 나는 이것을 ‘감동 있는 평강’이라고 표현하기를 즐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조심스러운 정의이지만, 바로 영적 능력이란 이런 상태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닌가 한다.

〈생명력 = 건강한 삶의 의욕 = 적절한 자존감 = 감동 있는 평강(행복감) = 영적 능력〉

 

상처는 바로 이런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질병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복음에 의한 치유가 일어날 부분은 바로 이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며, 목회의 중점은 바로 이 부분에 모아져야한다고 믿는다.

 

 

 

 

 

 

 

 

 

 

 

 

 

 

 

 

 

 

 

 

 

 

 

 

 

 

 

제11장 과거의 상처, 치료 받을 수 있다.

 

잠언 17:22“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과거 상처를 치료 받아야 한다. - 치료 받지 못하면 가정이 편하지 않고, 자신부터 원인 모르고 근심 걱정과 우울증과 불면증과 스트레스(stress)로 참된 평강이 없고, 불안하며, 상한 심령으로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 상처가 너무 깊으면 기도생활이 잘 안되고,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잘 못 받게 되고, 도리어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

왜, 나는 전도가 안 되고 다락방 기도가 잘 안되는가? 도리어 상처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 복음의 메시지를 계속 듣게 되면 어느 날 치유 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 상처(문제)들의 종류

1. 들어난 상처(문제)

2. 깊이 숨겨진 상처(문제) - 한국 사람은 은폐의식이 심하다.

3. 남은 아는데 자기도 모른 상처(문제, 쓴 뿌리가 깊이 박혀있음) - 문제가 있는데 없다고 한다.

4. 하나님만 아는 병(病)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출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사58:8〕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렘30: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하며 찾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한즉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히12: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롬 3:14〕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욥4:8〕“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잠22:8〕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 무엇이 악의 뿌리가 되는가?

〔딤전6: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돈을 사랑하는 것이 온갖 악의 뿌리가 됩니다. 이것을 가지려고 열망하는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고통을 당하고 마음의 상처를 입습니다.

한번 웃으면 면역이 6시간 올라갑니다.

한번 화내면 면역이 6시간 뚝 떨어집니다.

 

◆ 분노의 정의

hm;je 헤마 또는 am;je헤마(단 11:44) '열', 상징적으로 '분노'(그 '노기'에서), '독'(분, 심한, 불만, 노하여, 열, 분노, 독(毒), 격노, 노한, 격한 불쾌감, 분개, 화, 병)

〔잠14:30〕“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잠14:30〕“마음이 평안하면 몸에 생기가 도나, 질투를 하면 뼈까지 썩는다.”

〔잠14:30〕“마음이 평안하면 육신도 건강하나 시기하면 뼈마디가 썩는다.”

〔시112:10〕“악인(惡人)은 이를 보고 한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消滅)하리니 악인(惡人)의 소욕(所欲)은 멸망(滅亡)하리로다”

 

◆ 의사들도 말을 한다.

“분을 내면 모든 질병을 싸워야 하는 면역이 떨어진다.”

⇨암(癌)에 걸릴 확률이 많다.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분노는 마음의 등불을 꺼버리는 바람이라” 하였습니다. 분노의 진원지는 마음 안에 있는 상처입니다. 친절은 쉽게 잊혀 지지만 상처는 잘 잊혀 지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잊혀졌다할지라도 덮여 있는 것이지, 아물어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상처는 언젠가 건드려지면 아파 오며, 그로 인하여 분노의 바람이 일어 상대방을 찌르며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의 상처는 마음의 평강을 해치는 요인이며, 흑암의 세력이 파고드는 통로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과거의 상처는 반드시 그 뿌리를 알고 치유 받아야 합니다.

〔잠15:4〕“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15:13〕“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1. 과거 상처의 뿌리를 알고 캐내어야 합니다.

 

(1) 본래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존재로서 상처받을 요인이 없었고 벌거벗었으나 항상 자랑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완전한 보호막인 선악과의 언약만 굳게 붙들고 있으면 만물을 다스리고 축복하며 영생하는 존재였는데, 사탄이 뱀을 통해 사람을 미혹했습니다(창3:1-6).

(2) 미혹 받아 보호막을 깨트려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마귀와 악령들에게 사로잡혀 버린 사람은 결국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상실하고 만물을 통해 묶이고 상처받는 존재로 전락되어 버린 것입니다. 더구나 영적인 배경을 알지 못하니 눈에 보이는 것에 상처를 많이 입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하는 존재가 이길 힘도 없이 홀로 몸부림치며 살다보니 서로 상처들을 주고받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 간에, 학교에서, 대인관계와 어려운 환경들을 통해 상처들은 쌓여갑니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악령들의 세력은 영적문제를 일으키며 특수한 질병과 우상 숭배와 그 결과인 정신병 등으로 묶어갑니다.

 

2. 그러므로 우리를 속이는 영적인 배경을 알아야 됩니다(계12:7-9).

 

특별히 초 신자는 믿음생활을 잘 시작하고자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배경 때문에 벽에 부딪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1) 좋은 일이 있는 것처럼 속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11:14)

(2) 거짓말로 속입니다(요8:44).

어릴 때부터 이 존재들에게 속아 살아왔기에 보통 사람들의 생각들은 거짓으로 사상화 되어있어 거의 모든 판단들을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눈에 보이지 않게 정사와 권세를 움직이며 세상의 왕 노릇합니다.

(엡6:12-20)

사실 하나님 만나서 함께 하지 못한 사람이 어느 분야에든 깊게 들어가 성공단계에 이르렀다면, 분명한 사실은 흑암세력에게 단단히 얽매여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 분들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살펴보면 그 증거를 분명히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4) 우상숭배로 계속 얽매이게 합니다(고전10:20).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사 멸망치 않고 본래 상태를 회복하여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언약대로 직접 육신을 입고 인간 세상에 오셨습니다.

 

3. 해방 받아 본래의 축복된 상태를 회복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알고 믿어야 됩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세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1)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요14:6).

(2) 죄와 저주, 과거와 현재, 미래의 문제까지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막10:45).

(3) 이 지구상의 원수, 마귀의 세력을 꺾으셨습니다(요일3:8).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전히 이루시고, 이 구원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시기 위하여 지금도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영적 문제의 통로(사단이 나를 옭아매는 통로)가 되는 과거의 상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맡기면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 주님이 치유해 주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받는 순간, 우리의 모든 과거는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앞으로의 모든 삶도 보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과거의 모든 문제들은 해결되었고, 앞으로 어떤 상황이 와도 괜찮습니다. 노예로 가도 괜찮고, 감옥에 가도 괜찮고 죽어도 괜찮은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의 미래라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회복하지 못 하면 사업도 안 될 것이고, 선교도 안 될 것이고, 신앙생활도 안 될 것입니다. 더 더욱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끌려가게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도 우리를 속이며 공격해오는 영적 세력(마귀와 악령들)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안다면 우리는 모든 부분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을 다 벗어 주 예수님께 맡기고 이제는 온 세상 살리는 일에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 완전한 치유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 될 수 있다.

 

 

 

 

 

 

 

 

 

 

 

 

 

 

 

 

 

 

 

 

 

제12장 대인 공포증

 

대인 공포증은 "사회 공포증" 및 "사회 불안 장애"라고도 불린다. 불안이 특수하게 대인관계나 사회적 상황에서 남을 의식하여 생긴 창피한 감정을 중심으로 형성될 때 이를 "사회적 불안"이라고 한다. 낯선 사람과 얘기하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는 것 등을 두려워해서 이런 상황을 피하려고 하는 것, 심해지면 공황장애, 알코올중독 등이 생긴다.

 

예를 들면 혹시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이나 아닐까, 경멸당하고 있지는 않나 두려워하는 것으로 대인공포증이라기보다는 대인관계공포증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한 표현이다.

신경증의 하나로 분류되며 적면공포(赤面恐怖)·시선공포(視線恐怖)·정시공포(正視恐怖)·체취공포(體臭恐怖) 등도 모두 유사한 공포의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정신분열증이나 울증(鬱症) 등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대인공포증 환자는 신경증에 비해 사람을 혐오하는 경향이 강하다. 치유를 위해서는 불안의 원인을 규명하고 그에 따른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공황장애는 그럴 만한 이유나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갑작스럽게 나타난다. 공황장애의 주요 증상은 공황발작이다. 공황발작은 호흡이 가빠지거나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하며 어지럽고, 손발이 저리거나 몸이 떨리는 등의 신체적 증상과 함께 공포·불안·두려움 등의 심리적인 증상을 동반한다. 심한 경우 이러한 증상으로 곧 죽거나 미칠 것 같은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공황발작으로 인해 환자는 다음 발작에 대한 예기불안(아직 벌어지지 않은 위험에 대한 예상 불안)을 갖게 되어 행동이나 생활에 더욱 무능력하게 된다. 공황장애는 보통 20대에 가장 많이 발병하고, 남자에 비해 여자가2배 정도 많다. 발병 원인은 생물학적 요인, 유전적 요인, 심리적 요인으로 나누어진다. 생물학적 요인은 발병 원인을 뇌전달물질의 기능 이상으로 본다. 여기에는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유전적 요인은 공황장애를 가진 사람의 직계 가족 중에서 공황장애를 겪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점을 든다. 심리적 요인은 어릴 때 부모와 사별하거나 이별한 충격 등을 발병 원인으로 본다. 공황장애는 간혹 약물치료 없이 낫는 경우도 있는데, 정신치료 등과 같은 비약물 치료를 실시한다. 중증일 경우에는 약물치료가 꼭 필요하다. 커피나 술, 담배 등은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으므로 삼가는 것이 좋다.

 

우리나라에서는 증세가 심하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 탓이다. 이런 사람은 성취 지향적이며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많다. 부딪치면 별일이 아닌데도 다른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어 특정 상황을 회피하고 이 때문에 증세가 악화되는 것이다. 중증이 아닐 경우 상황에 부딪치면서 해결하는 것이 좋다. 한 번 자신감이 붙으면 극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 대인공포증 진단

 

(1) 사회 활동과 상황에서 현저하고 지속적인 두려움을 느낀다.

친밀하지 않은 사람들하고 있을 때와 다른 사람에게 주목받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수치스럽거나 당혹스럽게 행동할까봐 또는 불안 증상을 보일까봐서 두려워한다.

 

(2) 두려운 사회적 상황에 노출되면 언제나 예외 없이 불안해지며, 이는 상황과 관계가 있거나 그 원인이 되는 공황 발작으로 나타난다.

 

(3) 공포가 너무 지나치거나 비합리적임을 인식한다.

 

(4) 공포스러운 사회 활동과 상황을 피하려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강한 불안과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5) 공포스러운 사회 활동과 상황에 대한 회피, 미래를 예기치 못하는 불안, 이로 인한 고통이 정상적인 일상생활, 직업적(학업적) 기능 또는 사회적 활동이나 관계 형성을 심각하게 저해하거나 공포로 인해 심하게 고통 받는다.

 

(6) 18세 이하에서는 기간이 6개월 이상이 되어야 한다.

 

2. 사회공포증의 원인

 

(1) 가족배경

부모나 친척 가운데 이 장애가 많다는 것이 확증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공포증의 부모는 광장 공포증의 부모에 비해서 사회적 대인관계가 제한되어 있으며, 남들의 의견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편이고, 가족과의 친밀한 관계가 비교적 없는 편이다. 또 부모의 돌봐줌이 부족하거나 거절적이며 반대로 지나치게 과잉 보호적일 때 사회공포증이 더 발생한다.

 

(2) 고통스런 외상의 경험

자신이 처음 남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몹시 불안하여 고통스러웠던 사건을 기억하기 때문에 그 사건이 원인이라고 믿게 되고, 그때의 고통스러웠던 경험 때문에 사회적 상황이나 타인 앞에 서는데 대한 공포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3) 타고난 소질과 환경의 스트레스

어떤 아이들은 생소한 스트레스에 대해 지나치게 위축되는 성품을 가지는데 이로 인하여 억제적인 행동을 보인다. 그러다가 아이가 부모의 사망, 부모와의 이별, 부모와 형제들로부터의 학대, 가정 내 폭력 등의 스트레스가 만성적으로 가해지면, 어떤 시기가 되면 증상이 나타난다고 본다.

 

 

 

 

 

 

 

 

 

 

 

 

 

 

 

 

제13장 우울증의 오해와 이해-영적 차원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슬픔·절망·비관·자기비하·자기비난·식욕감퇴·수면장애·불면증과 일상생활의 보람·흥미가 감소 또는 상실되고, 열정·활력이 감소되며 사고·행동이 느려지는 등의 증상을 경험한다.

우울증은 소중한 사람이나 물건을 잃었을 때 나타나는 슬픔이나 비통과는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 불행을 초래한 사건이 있을 경우, 우울한 기분이 그 사건에 걸맞지 않게 심하거나 오래 계속된다면 우울증으로 간주된다. 조증(mania)과 번갈아 나타나는 경우를 조울증(躁鬱症)이라 한다.

우울증은 가장 흔한 정신질환이며, 히포크라테스가 울증(melancholia)이라는 이름으로 증상을 기술해 놓았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증상이 나타나는 형태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데 일시적이거나 항구적인 경우, 가볍거나 심한 경우, 급성적이거나 만성적인 경우 등이 있다.

우울증은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더욱 흔한데, 발생빈도는 남성의 경우 나이가 들면서 점차 늘어나며, 여성의 경우 35~45세 사이가 가장 높다. 우울증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나타난다. 부모를 잃는 것과 같은 어린 시절의 상처나 고난은 나이가 든 후에 우울증에 걸릴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스트레스가 우울증을 유발시키는 강력한 원인이기는 하지만, 사회심리학적인 원인과 생화학적 원인 또한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가장 유력한 생화학적 원인으로는, 대뇌에서 생성되는 모노아민 가운데 특히 노르에피네피린이나 세로토닌 분비과정의 결함을 들 수 있다. 이 화학물질들의 양 또는 활성도가 낮아서 우울한 기분을 유발시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울증의 치료에는 주로 3가지 방법이 쓰이고 있는데, 정신치료와 약물요법이 가장 중요하다. 정신치료는 환자의 마음을 편안하도록 도와주면서 우울증을 유발시켰다고 보여지는 내면적인 충동들을 풀어서 순화시키는 것이다. 반면에 약물치료는 환자 대뇌 속의 화학성분의 불균형상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항우울제 약물을 사용함으로써 증상의 개선을 꾀하는 것이다. 삼환계 항우울제는 체내 신경전달물질인 모노아민의 분해를 억제함으로써 효과를 나타낸다고 믿어진다. 분해억제작용의 결과, 이들 신경전달물질들이 대뇌에서 많이 생성되거나 축적되어 신경세포에 오래 작용하도록 함으로써 우울증을 개선할 수 있다. 반면에, 모노아민 산화효소 저해제들은 노르에피네피린과 세로토닌의 분해를 촉진하는 데 관여하는 산화효소를 저해하여 효과를 낸다.

우울증의 증세가 심하여 빠른 치료가 필요한 경우 전기충격요법이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방법은 환자의 뇌에 전류를 흐르게 하여 경련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우울증의 치료는 정신치료와 약물요법 또는 전기경련요법을 같이 사용할 때 좋은 치료효과를 얻을 수 있다.

 

우울증을 신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관점이 있습니다.

1) 우울증 환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

2) 우울증 환자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3) 우울증 환자에게 사단은 어떻게 개입하는가?

 

1. 우울증 환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 기쁨입니다.

▶죄로 에덴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 아픔입니다.

▶하나님은 아파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살리실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 그것은 구원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기쁨을, 죄를 지어서 타락했을 때에 아픔을

그들을 다시 살리시기를 원하는 구원의 소망의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 구원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애타게 일을 하셨습니다.

즉, 병들어 있는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계속해서 메시지를 주십니다.

- 성경 신구약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해라. 이웃과의 관계도 사이좋게 회복해라. 자연과도 친환경적으로 관계로 회복하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또한 이것은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그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 우울증 환자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우울증 환자가 겪는 현실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들의 심리는

1) 현실이 고통스런 사람은 그 자리를 도피하고 싶어 합니다.

도피하는 길은 두 방향입니다.

하나는 몸으로 도피하고, 또 다른 하나는 정신으로 도피합니다.

 

2) 현실이 고통스런 사람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원합니다.

양면성 때문에 드러내고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합니다.

그는 무기력감, 절망감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때론 도움도 요청 못합니다.

 

우울증 걸린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이와 같은 심리를 갖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내 힘든 것을 아시고, 나를 쉽게 고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평소 믿음 생활을 제대로 못한 사람은 죄책감으로 고쳐달라고 하기가 미안해서 눈치만 봅니다.

셋째 우울증에서 회복되지 못하면 자책을 하면서 하나님에게 분노하기도 합니다.

 

3. 우울증 환자에게 사단은 어떻게 개입하는가?

 

어떤 사람은 우울증은 사단이 끼여서라고 말합니다.

즉, 사단이 들어와서 우울증이 생겼다고 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닙니다. 너무 쉽게 귀신들렸다고 진단내립니다.

분명한 것은 우울증이 생기면 사단의 개입은 있습니다.

그러나 증상 자체가 귀신들린 것인지 아니면 증상이 아닌 다른 것에 공격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우울증이 귀신들린 것인가?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우울증을 주지 않으신다! 는데 나에게 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니 약 없이도 나를 회복시킬 수 있지 않은가?

- 맞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당신의 우울증을 확실히 치유 하실 수 있습니다.